[이기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2021.12.7.]
황남대총은 신라의 왕과 왕비, 왕·귀족이 묻혀있는 경주 대릉원에서도 초대형 고분에 속한다. 표주박 모양으로 조성된 이 고분은 내물(356~402) 혹은 눌지마립간(417~457) 부부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분이 왕(마립간), 북분이 왕비 무덤으로 보인다... 주인공(60대 남성)이 묻힌 주곽(으뜸덧널)에 딸린 부장품 공간의 청동시루에서 출토된 칠기 2점이었다. 이중 1점(남분)의 바닥에서 확인된 ‘마랑(馬朗)’이라는 붉은 글씨가 심상치 않았다... 이은석씨는... 정일 목포대 교수를 만나 ‘평생의 숙제가 있다’면서 ‘마랑’ 명 칠기 이야기를 꺼냈다.
... 과연 중국 서진의 갈홍(283~343)이 쓴 도교서적(<포박자>)에 ‘마랑’ 이름이 등장했다.
“마랑은 자가 수명이고, 바둑의 기술에서는 적수가 없으니 ‘기성(棋聖)’의 칭호가 있다.(馬朗 字綏明 圍棋藝無敵 有棋聖之稱)”
이 ‘기성’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내용도 여기저기서 나오는데, 한결같이 “기성은 바둑 최고수를 일컫는데, 마수명(마랑)과 엄자명 같은 사람들”(<포박자>·<의림>·<태평어람>)이라고 설명했다. 마랑이 바둑 전문서를 편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원강 연간(291~299) 조왕 륜의 사인인 마랑이 <위기세(圍棋勢)> 29권을 편찬했다.”(<통지> ‘예문학’)
조왕 륜은 사마륜(?~301)을 가리킨다. 진 선제(사마의·179~251)의 9번째 아들이다.
따라서 마랑이 사마륜의 요청으로 <위기세>를 편찬한 것은 3세기 후반임을 알 수 있다. ‘마랑’은 중국 서진(266~316) 시대에 실존한 인물이며, 바둑 전문서를 29권이나 펴낸 ‘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문양의 칠기통(‘마랑명’ 포함)이... 바둑돌통 1세트...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바둑돌 모양의 잔돌 243개가 확인된 바 있었다. 이 잔돌의 크기는 직경 1~2㎝, 두께는 0.3~0.7㎝ 안팎이다.
천마총(350개)과 금관총(약 247개)은 물론 7세기에 조성된 용강동 6호분(253개)에서도 바둑돌이 나왔다. 분황사터에서는 전돌로 만든 15×15줄 바둑판이 발견되기도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나라의 바둑사는 삼국시대부터 더듬어 볼 수 있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는 바둑·투호의 유희를 좋아한다”고 하였고,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백제의 풍속은 말타고 활쏘는 것을 중히 여기며, 역사서적도 사랑한다. 토호·저포와 여러 유희가 있는데 더욱 바둑두는 것을 숭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에 개로왕(蓋鹵王)과 고구려 첩자 도림(道琳)과 연관된 설화에는 바둑을 즐긴 개로왕 때문에 백제의 내정이 어지러워진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통일신라에 와서도 바둑이 상당히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제34대 효성왕 2년(738) 봄에 당나라에서 선왕인 성덕왕의 부음을 듣고 조문사절단을 보낼 때 당나라 현종은 문장가인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숙(邢璹) 사절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서 글을 잘 아는 것이 중국과 유사하다. 경이 큰 선비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절로 보내는 것이니, 가서 경서의 뜻을 잘 설명하여, 대국의 유교가 왕성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라. 그리고 신라 사람들은 바둑을 잘 둔다고 하니 특별히 바둑 잘 두기로 유명한 병조참군 양계응(楊季膺)을 부사로 대동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양계응이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둔 전적에 대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記) 중에는 다만 “우리나라 바둑 고수자들이 모두 그이보다 하수였다”라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또, 이 무렵 우리나라 기사(棋士)로서 당조(唐朝)에 들어가서 바둑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있었다. 헌강왕 때 박구(朴球)라는 사람이 중국 희종(僖宗)의 기대조(棋待詔: 황제의 바둑비서)를 지내다가 귀국할 때 중국의 유명한 시인 장교(張喬)는 다음과 같은 전별시를 지어 박구의 고수를 찬양하고 있다(삼국사기).
“바다 건너 저 나라에 그대 적수 뉘 있으리, 본국이라 기쁘지만 바둑수는 외로우리, 궁중 임 뫼신 자리엔 새로운 형세 전할 것이, 뱃전에서 판을 대하여도 옛날 기보 엎어 놓으리(海東誰敵手 歸去道應孤 闕下傳新勢 船中覆舊圖).” 당시 양국간의 바둑교류의 성황을 알 수 있는 말들이다.
...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장기·바둑 등 유희물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도 세력을 쥐고 있던 시절에 바둑을 즐기면서 한가로운 때를 보냈다고 한다. 전국에서 명수들을 초청하여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바둑의 명수들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광복 전까지 순장(順丈)바둑이라는 재래식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 순장바둑은 대국하기에 앞서 각기 8점씩 모두 16점을 일정한 곳에 두어 초석(草石)을 끝낸 상태에서 두기 시작한다.
[이종호, 세계제패의 원동력 한국류 순장바둑, korea.kr, 2005.10.17/24/31.]
중국 진대(晋代, 서기 265∼420)의 장화(張華)가 저술한 『박물지(博物志)』에 ‘요조위기단주선지(堯造圍碁丹朱善之)'라고 적혀 있다. 또한 『중흥서(中興書)』에는 ‘요순이교우자야(堯舜以敎愚子也)’라는 글이 있다. 우자(愚子)라 함은 요제(堯帝, 기원전 2333~2234)의 아들 단주(丹朱)와 순제(舜帝, 기원전 2234〜2184)의 아들 상균(商均)을 가리키는 말로 이 말은 ‘요나라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를 가르쳤다’와 ‘순나라 임금이 아들 상균의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하여 바둑을 가르쳤다’라는 뜻이다.
기반의 선을 평이라 하고 선과 선 사이를 괘라고 한다.
중국 원대의 순제 9년(1349년)에 엄덕보(嚴德甫)와 안천장(晏天章) 두 사람이 공동 편저한 『현현기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중국 고대의 황제 요ㆍ순은 바둑을 창안하여 그 아들에게 이를 가르쳤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의문을 품고 요제의 아들 단주와 순제의 아들 상균이 둘 다 어리석은 자였다고 하는데 모름지기 성군으로 추앙받았던 요ㆍ순 임금이 아들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리를 가르쳤어야 옳은 일이지 어찌하여 한가하게 노는 기구와 남을 기만하는 술법으로써 그 어리석음을 더하게 하셨을 것일까 했다. 그럴 리가 없다.’
일본의 소천탁치(小川琢治)는... 중국에서 요와 순을 내세운 것은 육조(六朝)시대에 바둑이 유한(有閑) 계급들로부터 호감을 받게 되자 바둑이 재지(才智) 계발(啓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요와 순이 만들어서 남긴 것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졌고 추후에 점점 과장이 되어왔다고 추정했다.
한편 바둑 역사가 미즈구치는 바둑의 기원으로 중국의 은나라(기원전 16세기~17세기)로 잡고 있으며 전국시대에 바둑이 활발히 두어졌음은 인정했다.
원나라 말기 지정 9년(1339)에 구양현은 『혁서(弈序)』에서 자신의 성미가 급하고 졸렬하며 어렸을 때 가난하여 학문을 닦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금(琴)과 바둑(弈)에 무지하여 매번마다 사대부들에게 조롱을 받았다며 바둑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날에는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소학(小學)을 가르쳤고, 20세가 되면 약(弱)이라 하여 관례(冠禮)를 치렀는데, 이때쯤 되면 벌써 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 이 여섯 가지 재능을 다 익힌다. 그리하여 훗날, 활쏘기를 하고 난 뒤 여가 시간에 투호(投壺)로 예(禮)를 관찰했고 바둑을 두어 지혜를 점검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양심(良心)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긴장과 이완을 조절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위(魏)나라 한단순(邯鄲淳)의 『예교』, 오(吳)나라 위소(韋昭)의 『박혁론』, 송(宋)나라의 『오잡조』등의 문헌에는 한위(漢魏) 이전의 바둑판은 17×17줄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내용은 1953년 중국 한(漢)나라의 망도(望都, 하북성)에 있는 고분을 발굴한 결과, 그 안에서 17×17로 된 돌로 만든 바둑판이 출토됨으로써 사실임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후한말부터 삼국 시대에 행해졌던 바둑이 17줄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6세기 전반 양무제(502〜549)가 19줄을 사용했다는 점을 들어 6세기 전반에 19줄이 도입된 것 아닌가 추정한다.
중국의 『북사(北史)』 <백제전>, 『주서(周書)』 <백제전>, 『수서(隋書)』 <동이전> 등에는 「백제의 풍속에 투호ㆍ저포 등 여러 가지 놀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바둑을 가장 숭상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구당서(舊唐書)』 <고려전>, 『신당서(新唐書)』<고려전> 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바둑과 투호놀이를 좋아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신당서』 <신라전>과 『구당서』 <신라전>에는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낼 때 신라인들이 바둑을 잘 두므로 바둑을 잘 두는 인물 솔부병조참군 양계응(楊季鷹)을 부사로 삼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삼국유사』에도 바둑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신라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기 전 왕자로 있을 때 신충(信忠)과 함께 대궐 안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 왕자는 신충이 어질고 현명한 데 마음이 끌려 ‘후일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으면 저 잣나무가 증언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려시대에는 여성들도 바둑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문호 이규보(李奎報)는 평양 기생 진주(眞珠)가 바둑이 상당한 고수임을 알고 한판 두기를 바라는 내용의 시를 써서 보냈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다. 그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자주 어울려 바둑을 두었는데, 당대 제일가는 고수로 알려졌다. 또한 이순신 장군도 평소 바둑을 즐겼다는 것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바둑 두었다는 말이 4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매우 바둑을 즐겼는데, 김만수라는 사람이 바둑을 잘 둔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다가 함께 바둑을 둔 결과 실력이 우수하자 대원군은 김만수를 의성(義城) 고을의 사또로까지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기단 초창기의 노국수이자 한학자인 신호열(辛鎬烈)은... 순장바둑이란 그냥 우리말이며 한자로 표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 만약 꼭 한자로 쓴다면 순수한 어른스런 점을 놓고 둔다는 의미에서 순장(純丈)이 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설명했다... 한학자 홍진표는 순장(巡將)으로 쓰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판 위에 17의 배자를 놓은 모양이 요소마다 장수를 배치한 것과 흡사하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말이라는 것이다... 권명수는... 순장(巡將, 쒼+쟝)이란, ‘처음에, 맞서게+쌓고 두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조남철 9단은 자서전에서 순장(順丈)바둑이라고 표기했다. 이것은 순번대로 장(丈)점을 놓고 둔다는 의미이다.
한편 1933년 11월, 조선기원에 나오는 몇몇 국수급 기사들이 후진들을 가르치기 위해 『신정기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순장바둑의 맞바둑 기보와 접바둑 기보, 그리고 순장바둑 정석 등이 게재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순장이란 말은 없고 장점(將點)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구한말 고종 때 금부도사와 중추원의관 등을 지낸 정환직의 기국문에는 ‘순장혹흑점겸백권이흑마(巡將或黑點兼白圈以黑摩, 순장은 흑점, 또는 백의 세력권에도 흑기를 꽂았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장이라는 말은 적어도 일제강점기에 생긴 말은 아닌 것이 확인된다. 반면에 문용직 五단은... '순장의 어원은 순랏길로 궁성 수비를 하는 종3품 이상의 벼슬아치로 볼 수 있다. 논어에 나오듯이 천원을 북극성으로 볼 때 이를 둘러싸 지키는 순장바둑의 형태는 조선 성리학의 세계관과 맥이 맞닿아있다고 여겨진다.'... 권경언 6단은 ... 순장은 한문의 어조가 분명한 것으로 보이므로 한자를 사용할 때는 순장(巡將)이 옳다고 설명했다.
2005년 4월 바둑사료연구가 안영이씨...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에 게재됐던 순장바둑 기보(棋譜) 39개를 새로 발굴하여 공개했다. 그가 발표하기 전까지 내려온 순장 기보는 3, 4국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새로 발굴된 순장 기보 39국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26년 <중외일보>에 실렸던 도은각ㆍ김형권의 「제1회 명가기전 신국」으로 지금까지 최고(最古) 순장 기보로 전해져 온 1927년의 윤경문ㆍ손득준 대전 기보보다 앞선다... 1937년 3월 말부터 한 달여 동안 게재된 노사초ㆍ채극문 대전 기보는 마지막 순장 기보이다. 1937년 1월 1일을 기해 유진하ㆍ윤경문 등의 국수급 기사들이 ‘현대화’를 명분으로 순장바둑의 폐지를 결의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1926~1938년 사이 <중외일보>와 <매일신보>에서는 1착을 백으로 시작한 것과 달리, <조선일보>에서는 1933년부터 일관되게 복점(腹點, 천원)의 흑1을 첫 점으로 표기했다. 또한 순장바둑에도 현대식 ‘덤(공제)’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마테오리치는 중국 사람들은 바둑만 잘 두면 다른 것으로 그 능력을 증명해 보일 필요 없이 무엇이든 잘 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고 적었다고 남치형은 적었다.
러시아의 수학교수 라자레프(Lazarev. A. V.)는 지난 2001년 발표한 '고대 바둑이 현대과학과 경제학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바둑의 운명과 관련해 정곡을 찌르는 문제를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