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달려가던 무수 한 밤의 서막

그렇게 7년을 버텼다.

by 심플맘

새벽 4시, 나는 참다 참다 자고 있는 신랑을 깨웠다.

아이를 보러 친정에 가야겠노라고. 보고 싶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역시나 오늘도 또 였다. 나는 울며 가야겠다고 말했다.

신랑은 묵묵히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고 묵묵히 차키를 들고 묵묵히 운전하여

나를 친정에 데려다 주었다.

어스름한 새벽, 나는 친정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다가 누군가 오는 소리에 놀라 일어난 친정 부모님은 이렇게 또 와있는 나를

출산한 지 100일을 겨우 넘긴 딸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셨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0을 갓 넘긴 나는 자상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신혼을 즐길 새도 없이 임신을 하였고 아이를 낳았다.

그 사이 아이 낳기 10일 전까지 직장을 다녔다.

결혼할 때부터 맞벌이를 쭉 예상하였기에 회사 근처에 집을 얻어

어렵지 않게 만삭까지 다녔다.

그리고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순산하였다.


평직원 중에 최초로 출산휴가를 쓴 상태, 육아휴직을 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출산 휴가 90일 만에 복직을 하였고

아이는 첫 며칠만 친정 엄마가 집에 와서 봐주시다 친정에 데리고 가셨다.

버스로 1시간,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친정이었기에 언제든 갈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운이 좋은 상황이었다. 회사는 나의 복직을 눈 빠져라 기다려 주었고

아이를 사랑으로 돌봐 줄 친정 부모님까지 계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밤이면 밤마다 아이가 보고 싶어 끙끙 앓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제 손으로 키우지 못하는 내 상황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이해가 되지 않았고 신랑이 원망스러웠다.


돌이켜보면 남들보다 모성애가 많기도 하였고 꽤나 감정적이었고

호르몬의 영향이 컸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그때의 그 감정은 해소되지 않는 내면 안으로 깊숙이 박혀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가 8세가 되는 올해, 육아휴직을 하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는

내 안의 감정과 월급 사이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엄마 어디가?라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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