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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MNI Jun 22. 2020

차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수술 후 첫 외래 진료가 있는 날, 과감히 연차를 썼다. 평소 같으면 오전에는 출근해 업무를 처리하고 오후 반차를 썼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술 이후 망가진 수면 패턴으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유달리 고역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날에는 조금 더 늦장을 부리고 싶다. 비록 아침마다 챙겨야 하는 호르몬 약 때문에 통잠이 불가능할지라도.


점심을 간단히 먹고 병원에 가려고 신촌역에 내렸다. 좋아하는 라멘집에서 식사를 할 생각에 설렜는데, 문을 닫아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유동인구가 줄어든 게 이유일까. 진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근처에 보이는 도시락 가게에 들어가 메뉴를 골랐다. 맛이 없었다. 약을 먹어야 하니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었다. 전혀 즐겁지 않았다.


갑상선에 있던 자그마한 혹은 암이었다. 인근의 림프절까지 조금 전이가 되었지만, 다행히 모두 절제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교수님은 수술 부위의 예후도 좋으니 호르몬 수치가 올라올 때까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자며 나를 다독였다. 움직이면 숨이 가쁘고 가끔 손발이 저릴 때가 있지만, 내가 보기에도 부기도 없고 기침이나 가래도 많지 않다.


교수님께 그간 궁금했던 점을 여쭤보려는데 마치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내가 말하려는 게 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한참을 멍청히 있었다. 생각과는 다른 단어가 불쑥 튀어나와 ‘아 그게 아니라’를 두어 번쯤 말했다. 뇌는 아직 마취 상태인 걸까? 간호사 선생님이나 보험사 상담원과 대화할 때도 증상은 계속됐다. 느릿한 말투와 어리숙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생경한 내 모습이 답답하기보다는 신기했다. 나도 이렇게 천천히 말할 수 있구나. 어디 가서 말 못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으니, 한동안 나를 만나는 지인들은 이런 내 모습이 생소하겠지.


이번 기회에 여러 번 차근히 사고하는 습관이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급한 성격은 어찌할 수가 없나 보다. 보험사 상담원이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4시간째 메시지로 보내주지 않아 답답하다. 전화하고 싶다. 차분한 사람이 되긴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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