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면적 605.2 km², 그 안의 카페 수 24,029개(서울특별시 우리 마을 가게 상권분석 서비스, 2021년 4분기 기준). 지금은 카페가 이토록 성황인 데다 카페마다 커피와 어울릴 디저트로 케이크를 파는 게 일상이 되었다지만, 케이크라고 하면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디저트)이라고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다.
조각 케이크가 아닌 홀(whole) 케이크는 상대적으로 쉽게 구매하지 않는 음식이기도 하고. 그러나 조각 케이크가 접근하기 쉬워졌다고 한들 케이크는 여전히 특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케이크는 '예쁘게' 포장되고, 크림이 망가지지 않도록 '특수한 보호 필름'까지 붙여진 상태로 판매된다.
케이크 판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았다면 아르바이트생들이 케이크를 얼마나 아기 다루듯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케이크 표면의 크림이 손가락이나, 주변에 닿아 살짝 망가지기라도 하면 가치가 떨어져 버리니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뭉개진 케이크는 어떨까? 얼마 전, 필자는 뭉개진 케이크를 돈 주고 사 먹은 소비자가 되었다.
'트리오드'는 강남의 오프라인 카페다. 이 가게의 시그니쳐는 스쿱으로 떠주는 케이크, ‘케익그람’이다. 말 그대로 냉장 보관된 커다란 판 케이크를 아이스크림 스쿱처럼 생긴 스푼으로 떠서, 그램 수를 기준으로 가격을 매겨 판매한다. 층층이 레이어드 된 케이크를 커다란 스푼으로 뜬다고 생각해보라. 1 스쿱은 100g 정도이지만, 어쩌다 100g 미만의 케이크가 떠졌거나 100g 이상의 케이크를 주문했다면 그 접시는 '모아 놓은 케이크 덩어리'가 된다. 그래서 '트리오드'에 방문한 필자가 끔찍한 경험을 했냐고? 대답은 "No."다.
처음 '트리오드'에 대해 알게 된 건 SNS를 통해서였다. 케이크를 그램 단위로 파는 카페가 있고, 심지어 맛있다는데 신기하지 않을 리가. 당장 찾아가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일에 치여 필자가 방문했을 즈음에는 이미 유명세가 높아져 평일임에도 모든 테이블이 만석이었다. 겨우 자리에 앉았을 때는 머릿속에 '케이크가 특이하다'더라는 이미지만 남아 있었는데, 실제로 겪어 본 '카페트리오드'의 '케익그람'은 꽤 만족스러운 케이크였다. 사람이 많을 만도 했다.
'케익그람', 출처 : '트리오드' 공식 SNS
케이크의 특이한 콘셉트도 흥미로웠지만, 필자의 눈을 끈 것은 '트리오드'의 영리한 기획력이었다. 관행을 버리고 색다른 시도를 하는 것은 비용이 든다. 새롭고 예술적인 시도를 하는 파인 다이닝의 코스트가 대체로 높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소비자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킬 만한 아이디어, 즉, 도전적인 아이디어일수록 높은 비용이 들 가능성이 높고, 높은 비용은 도전의 지속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나 ‘케익그람’의 방식은 오히려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 애초에 ‘고정된 형태’에 얽매이지 않아 케이크를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 쓰이는 인력, 보호 필름 등의 형태 관리 용 부자재가 줄었을 것이고, 케이크의 모양을 관리하는 데 쓴 넓적하고 큰 케이크 보관 케이스는 겹쳐 쌓아 보관할 수 있으니 보관 공간 비용을 줄였을 것이다. 케이크에 토핑으로 올라가는 과일을 후 첨 하는 것도 케이크 위의 과일이 마르거나 상하는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법이었을 터다.
‘케익그람’이 단순히 비용을 줄이는 데에만 집중했다면, 필자가 ‘뭉개진’ 케이크를 먹겠다고 결정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케익그람’은 아주 쿨했다. 소비자 스스로 바이럴을 일으킬 만큼.
앞서 새로운 시도에는 비용이 들고, 비용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지속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상품을 개발할 때 이 모든 것에 앞서 더 중요하게 봐야 할 포인트가 있다. 바로, 제품의 카테고리가 필수로 가져야 할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다.
‘뭉개진 케이크’라고 하면 케이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비자 혜택 – 특별한 디저트라는 속성이 망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스쿱으로 떠진 케이크 베이스에 토핑 장식으로 인스타그래머블한 디자인을 완성하면서 케이크가 가져야 할 기본 가치를 잃지 않았다. 성공적인 제품 개발과, 그를 통한 마케팅의 성공을 위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서의 고려가 필요하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두 가지의 조건 만으로 상품의 수명 주기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케익그람’이 마이크로 트렌드를 넘어 트렌드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영역의 고려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