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엘리펀트 송' (스포는 최대한 참았습니다 ㅎ~)

- 오늘의 질문

by 지안

예능 프로의 한 장면을 스치듯 보았다. 운전석과 조수석의 두 남자. 화면상으로는 신나는 대화를 나누는 중이 분명했는데, 자막은 “서로 하고 싶은 말만 떠드는 두 사람”. 대충 설명하자면 한 명은 풍경에 대해 감탄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식사에 대해 주장하고 있었다. 맞장구를 치지도 질문에 대답을 하지도 않지만, 음소거된 장면으로는 충분히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 이 연극, ‘엘리펀트 송’이다. 아, 둘이 아니고 셋의 대화다. 즉 세 사람이 속 내는 숨긴 채 대화를 나눈다. 당연히 질문과 대답은 어긋나고, 삐걱거리며, 짜증스럽고, 격해지고 급기야 위험해진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아이가 있다. 우연한 기회가 왔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아이의 이름은 마이클 알린.


아무것도 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남자가 있다. 가당치 않게,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는 사라진 동료 의사를 찾는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해야만 한다. 남자의 이름은 닥터 그린버그.


여자가 있다. 아이를 알고, 이해하는 만큼 모든 상황이 두렵다. 그러나 닥터 그린버그를 포함한 타인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그녀의 이름은 피터슨.



표면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닥터 그린버그다. 그는 마이클에게 알아내야 할 진실이 있다고, 자신이 그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질문하고 질문하고 질문한다. 마이클의 성이 ‘알린’인지 ‘앨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 처음 만난 아이의 이름보다 훨씬 중요하고 심각한 걱정거리를 안고 있고, 심지어 자신 만이 그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계속 울려 대는 전화는 무대 위의 상황보다 그를 더욱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음을 암시한다. 닥터 그린버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수화기 너머의 상황을 애써 외면할 뿐이다. 그러니까 돌려 말하자면, 닥터 그린버그는 진정으로 그가 책임져야 할 일을 벗어나기 위해 마이클과 마주 앉아 있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가장 강력하게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마이클이다. 그는 닥터 그린버그의 질문에 ‘자신의 의도에 맞는’ 대답을 내놓는다. 때로는 허언이고, 가끔은 거짓말을 시도하지만, 결국 아이는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위선 떠는 것은 딱 질색이라서 참을 수가 없는” 아이는 “편견에 가득 찬” 정신과 의사를 상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일 중 하나는 자신에게 애정을 가진 피터슨을 이 일에서 배제시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피터슨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 곁을 맴돌아 보지만 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연극을 보는 내내 떠오른 것은 ‘지퍼’였다. 혹시 당신이 오늘 입은 점퍼에, 청바지의 앞부분에 달린 그것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이 맞물려 차곡차곡 올려져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물건. 마이클의 대사를 단 하나라도 흘려 들었다가는 이가 빠진 지퍼처럼 쓸모없게 될 것이다. 맥락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마이클의 대사는 일정 시간 쌓인 후 하나의 모양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당신은 그 정교함에 감탄하게 되리라.


예를 들면 이 연극의 제목인 ‘엘리펀트’. 코끼리에 집착하는 마이클은 닥터 그린버그의 질문을 코끼리에 대한 설명으로 되돌려준다. 코끼리는 ‘모계사회’를 이루고 있고, ‘동족의 뼈를 알아보고’, ‘가족의 슬픔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 ‘포유류 중 임신기간이 가장 길어 22개월이고’,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나올 법한 사실들이고(자, 그러니 연극의 스포도 아니다!), ‘동물에 왕국’에서도 흔하게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이지만 이 짤막한 문장들마저 지퍼의 칸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별 의미 없이 마이클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낡은 코끼리 인형처럼.


마이클이 코끼리 인형에 ‘안소니’란 이름을 준 것처럼, 어떤 것에 ‘이름’이 붙으면, 그에 합당한 역할과 책임이 뒤따른다. ‘군대’라는 이름이 붙은 집단이 ‘국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다’ 거나, ‘선생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이를 학대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 ‘존재의 위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엄마’ 혹은 ‘부부’라고 불린다면, 그것에 맞는 책임 있는 행동을 기대하게 된다.


대부분 책임을 회피하는 쪽은 ‘강자’다. 그는 그 결과로 아무런 슬픔 내지 충격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 받고, 좌절하고, 아무런 대비 없이 아파지는 것은 언제나 약한 쪽이다.


그러나 운명이 장난을 치는 지점, 그 강자가 상처 받는 의외의 지점에서 약자는 최고의 복수를 감행할 수 있다. 물론 약자는 그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와 피폐해진 정신으로 끝없이 고통받는다. 운이 없다면 그에게 하나 남은 ‘자유’마저 사라질 수 있다. 어느 쪽에도 해피엔딩이란 없다.



무대는 한차례도 바뀌지 않는다. 책상과 간이침대와 의자가 있는 진료실이 전부다. 그곳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오로지 배우들의 몫이다. 첫 주의 공연이라(두 번째 공연이었다) 배우들의 긴장이 관객석까지 느껴졌다. 조금 더 마이클에게 익숙해지고, 닥터 그린버그에게 연민이 생긴다면, 피터슨의 사랑에 동감할 수 있다면 훌륭해질 것 같다.


책임감을 빼고 나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자유가 아닐까? “언제나 당신들에게 협조해 왔지. 하지만 오늘은 내가 결정 내릴 거야.”라고 소리치는 마이클의 목소리가 잘 벼린 칼날처럼 파고든다.


나보다 강자에게 ‘결정은 내가’라고 말한 적이 언제였던가? 회사를 들어가고 나서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이러니 지금 누구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마이클을 빙자해 쓰린 속에 소주를 넘기는 그런 밤이다.


-오늘의 질문 : 당신은 당신의 역할에 책임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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