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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25. 2022

웨이스티드

-아트원씨어터 2관

 켜진 무대 앞. 의자에 앉은 단정한 복장의 여성이 보인다. 그녀의 뒤,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세 명의 사람도 눈에 들어온다.  


의자에 앉은, 아서 니콜스 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아마도 인터뷰 중인 듯하다.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는 질문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어느 순간 그녀 뒤에 서 있던 세 사람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동시에 시간은 과거로 돌아간다. '아서 니콜스 부인'이 '샬롯 브론테'였던 시간으로.




이 뮤지컬은 소설 [제인 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와 나머지 형제자매에 관한 이야기다. 남동생인 브란웰 브론테(Branwell Bronte), [폭풍의 언덕]의 작가로 유명한 셋째 에밀리 브론테(Emilly Bronte), 역시 작가였던 막내 앤 브론테(Anne Bronte)가 그들이다. 19세기 영국의 시골인 요크셔 지방에서 활동하는 성공회 목사의 자녀로 태어난 이들은 귀족들에게는 짜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시기를 받으며 살고 있다.


집안의 주 수입원이자 가장인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못하고 교회 사정이 넉넉지 못하다 보니 이들의 살림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가족 중 죽은 사람이 어머니뿐인 것은 아니다. 샬롯은 원래 셋째였다. 첫째도 둘째도 병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결핵이나 성홍열, 폐렴 같은, 지금이라면 약 몇 알이면 나을 수 있는 병에도 쉽게 목숨을 잃었다. 그런 때였다.


살아 남은, 똑똑하고 교육받은 자매들은 돈을 벌고 싶지만 방법이 별로 없다. 가정교사를 가장한 유모나 침모, 고용주 마음대로 좌지우지되는 선생 정도의 직업을 가질 수 있을 뿐이고 이마저도 드물다.




그런 세상에서 살롯은 아버지의 건강을 돌보며 살림을 하고 세 동생을 뒷바라지하며 가정을 이끈다. 아버지의 교회에서 일하는 부목사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에도 아들인 브란웰의 뒷바라지만큼은 해주려고 노력한다. 당시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딸들의 운명은? 아마도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당시는 여성이란 그야말로 '웨이스티드(Wasted)'하다고 생각하던 19세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남자들은 여성이 웨이스티드- 즉 쓸모없고 낭비적이라고 믿었다. 남성만이 특별하고, 의미 있고, 멋진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여기까지 읽은 후 기분이 나빠졌다면 그럴 필요 없다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이건 과거에 관한 '펙트'다. 당신이 만족할 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현재의 몫이다.




자, 이런 빅토리아 풍 런던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네명의 형제 자매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아마 멋지고 낭만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겠지. 나뿐만 아니라 모든 관객들이 그런 마음을 품고 숨을 죽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나는 이 뮤지컬이 '샬롯 브론테'의 이름만 빌려와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실제 그녀의 전기를 기본으로 한다. 샬롯과 에밀리, 앤과 브란웰의 실제 인생이 작품 안에 녹아 있다. 영국인들에게 브론테 가문의 형제들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뮤지컬로 만들어질 정도면 상당히 유명하고 알려진 가족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인 내게는 그렇지 않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그렇다. 나는 그들의 삶을 모른다.


그러니 무대 위에 펼쳐지는 이야기의 순서를 애써서 따라가야 한다. 간소하게 미니멀리즘으로 구성된 무대는 남매들의 콘서트 무대로 손색이 없지만,  낯선 삶을 상상해야하는 관객들에게는 뭔가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우리는 새로움과 독창성을 만나기 위해 극장을 찾지만, '딱 반걸음' 정도의 앞선 무엇이어야 한다. 두어 걸음 앞에 선 낯설고 복잡하고 특이한 이야기에는 몸이 굳는다. 이야기에 빠져 함께 나아가기보다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스토리를 납득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런 긴장감은 '진입장벽'이 된다. 온전히 몰두하기보다는 자꾸 한걸음 떨어져 극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보니 절정의 높이가 너무 낮다. 주인공들은 19세기, 여성, 교육을 받았지만 꿈조차 펼 수 없던 시대라는 모든 제약 조건을 뛰어 넘어 '명성'을 얻긴 했지만,  150분인 작품의 길이에 비해 행복한 시기가 너무 짧고 약하다. 게다가 명성의 결과 따라온 것들로 인한 좌절은 누군가를 죽일 정도로 강하다. 이 정도면 비극이다. 즐거운 노래로 극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관객의 마음속은 답답하고 뒤틀린다. 쉽게 무대 위의 흥을 쫓아가기 부담스럽다. 관객은 충분히 행복해지지 못한 채 끝을 향해 질질 끌려간다.




이 작품의 제목 웨이스티드(Wasted)가 '여성의 삶'을 향하고 있는 말은 아니다. 이 뮤지컬이 하고 싶었던 말은 광고 문구에 나와 있듯 '빛나지 못한 삶은 헛된 것(Wasted)인가'를 묻고 있다. 작품으로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혹은 악평에 시달리더라도 그것은 '헛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의 인생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떤 인생도 '헛된' 것은 없다. 이런 주제는 충분히 전달받았다.


하지만 계속 찜찜하다. 관객은 흥겨운 노래 속에서 충분히 행복했다가 그대로 끝나던지 혹은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질 권리가 있다고 나는 믿는 편인데 이 뮤지컬에서는 쉽지 않다. 나만의 생각이었다면 뭐 할 수 없지만........




뮤지컬, 그중에서도 락 뮤지컬답게 배우들의 노래는 거침없다. 시원하게 귓가를 때린다. 하지만 극이 끝난 뒤 머리에 남는 것은 없다. 아마도 같은 곡의 변주보다는 새롭게 여러 곡으로 승부를 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노래를 들었다는 느낌은 남지만 어떤 노래가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아쉽게도 기억나는 노래도, 심지어 멜로디 한 마디도 없다.


극의 무게를 꽉 지탱해준 샬롯 역의 유주혜 배우나 19세기 남자답게 이기적이고 정신 나간 모습을 잘 표현한 브랜웰 역의 김지철 배우도 훌륭했지만 야성적인 애밀리를 시원하게 표현해준 김수연 배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계관 시인의 편지를 묘사하는 그녀의 모습에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아름다운 장민재 배우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의상팀과 소품팀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아름답게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로 인해 공연 내내 행복했다.




잘 만든 뮤지컬이란 어떤 작품일까. 뭐 여러 가지 조건이 있을 것이다. 내게 잘 맞지 않는 작품이라고 해서 꼭 나쁘다는 말도 아니다. 어떤 뮤지컬은 누구에게는 웨이스티드 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누구도 웨이스티드 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듯 모든 뮤지컬은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을 것이다.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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