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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16. 2022

음악극 올드 위키드 송

- 예스 24 스테이지 2관

미국의 만화가 ‘아티 슈피겔만’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의 이야기를 그린 [쥐]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린 아티가 친구들과 롤러스케이트를 타다 줄이 끊어져 뒤에 남겨진 후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가 묻는다.


“아티, 그런데 너 왜 우는 거냐?”

“제가 넘어졌는데요, 친구들이 절 두고 가버리잖아요.”

“친구? 네 친구들? 그 애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며 그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홀로코스트가 인간에게 끼친 해악은 배고픔, 노동, 사망 같은 물리적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성, 인류애, 사랑, 우정과 같이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적 감정들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깨닫게 만들었다.



무대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고풍스러운 방이다. 박스를 든 늙은 남자가  그곳으로 들어온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한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만 피아노 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문이 열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젊은 남자가 들어온다.


젊은 남자의 이름은 스티븐이다.  비록 지금은 슬럼프에 빠져 있지만, 한때 미국의 천재 피아니스트로 칭송받던 스티븐 호프만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고 쉴러 교수에게 설명한다. 늙은 남자는 자신은 쉴러 교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요제프 마쉬칸일세. 모두들 나를 마쉬칸이라고 부르지.

그런데 이 마쉬킨이라는 사람, 좀 짜증 나는 캐릭터다.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멋대로 '슈테판'이라고 부른다. 독일어로 읽으면 그런 거라면서. 진짜 마음에 안 드네....



 마쉬칸은 스티븐이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모두 배워야 쉴러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스티븐은 화를 낸다. 자신은 피아노를 배우러 온 것이지 성악을 배우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온 것이 아니다.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이런 근본 없는 화에 똑같이 반응한다면 마쉬칸 교수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느물 느물 넘어온 사람답게 스티븐의 화를 돋웠다가 달랬다가 가라앉히고, 다시 도발한다. 게다가 쉴러 교수는 오스트리아에 없단다. 할 수 없이 수업이 시작된다.



이 연극은 존 마란스(Jon Marans)가 1995년 발표한 작품이다. 20년 전 작품이지만 현재에도 유효한 부분이 많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오스트리아의 극우정당  힘이 대단했다. 토착 왜구의 발흥을 입술을 깨물며 지켜봐야만 하는 슬픔은 우리의 일만은 아니다.


극의 배경은 1986년이다. 학교 밖은 선거로 시끄럽다. 당선이 유력한 후보는 쿠르트 발트하임(Kurt Josef Waldheim)이다.


쿠르트 발트하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육군에 복무했다. 즉 전직 나치가 단죄도 심판도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이다. 그의 혐의에 불투명한 부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도 미국과 주요 유럽 국가들은 그를 입국 금지 명단에 올려놓았으니까. 쿠르트 발트하임은 확실한 나치였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선거의 결과를 예측한다. 결과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일 뿐.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아마 미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야 할까. 공격당하기 전에 선수를 쳐? 아니면 굴복해야 할까?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다. 마쉬칸과 스티븐. 2인극이니 당연히 티키타카가 중요하다. ‘음악극’이라는 소개답게 음악도 있다. 두 사람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쓸데없이 화를 내는 사람과 그에 반응하는 상대편의 합이다. 


정휘 배우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스티븐을 매력적으로 표현했다. 예의라고는 페스츄리 부스러기만큼도 없던 스티븐은 점점 마음을 열고 마쉬칸의 수업에 집중한다. 귀엽다. 남경읍 배우의 마쉬킨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매력이 있다. 금방 발끈하고 쉽게 감정이 넘실거리는 제자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쥐고 흔든다.


인터미션에 뒷자리 관객이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와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을 알았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고 푸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천 퍼센트 동감한다. 독일어 버전까지는 필요 없지만 가사의 내용과 음악을 알고 가면 좋을 것 같다(저는 그런 것 1도 모르고 갔긴 했습니다만).


대사 중 '한국'을 언급하는 부분을 찾는 재미도 있다. 번역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끼워 넣은 것인가 의심했는데 아니었다. 원작에 이미 언급되어 있다.



홀로코스트 같은 걸 경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제 강점기나 종군위안부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그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느꼈을 절망과 분노, 좌절과 희망이 어떤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가끔 [올드 위키드 송] 같은 작품을 만나면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잊으면 반복되기 때문이다. 반복된다면 이번에 당할 사람은 나이거나 나의 아이들이다. 절대 안 된다.


가끔 부럽다. 홀로코스트를, 유대인의 고난을 소재로 한 훌륭한 작품이 이렇게나 많다니. 능력 있는 한국 작가들, 더욱 분발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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