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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14. 2022

광부화가들

- 두산 아트센터 연강홀

연극을 보러 가는 날은 12시간의 야간 근무를 두 번 연속으로 해치운 후 퇴근해 쪽잠을 자고 일어난 오후였다. 티켓을 예매할 때의 나는 오늘의 내가 얼마나 피곤한 상태일지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짓을 했지,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겠는데 어쩌지, 쯧…… 이렇게 구시렁거리며 잦아드는 몸을 겨우 일으켜 극장으로 향했다.


1934년 어느 날, 애싱턴(Ashington)으로 출장 가던 로버트 라인언의 마음이 이랬을까.




로버트 라이언 선생은 첫인상을 고려해 가능한 점잖고 격식 있는 옷을 차려입었다. 한쪽 어깨에 맨, 작은 슬라이드 기와 그림 자료가 담긴 묵직한 가방은 굽은 어깨를 타고 거추장스럽게 흘러내린다. 마침 연착되는 기차 시간표와 자신의 시계를 번갈아 노려봤을 수도 있다. 첫 강의부터 지각이라니 낭패군, 이런 생각을 떠올렸기 쉽다.


그가 근무하는 뉴캐슬 대학은 런던에서 한참 북쪽으로 올라와야 하는 작은 도시에 있지만 아무튼 대학 건물과 도서관, 상점, 여러 가지 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탄광촌으로 향하는 기차는 선생을 색감을 쏙 뺀, 회색과 무채색이 가득한 길로 인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미술감상 수업이 있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강의실에 둘러앉은 낯선 사내들의 표정을 보며 로버트 라이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왜 이 강의를 맡겠다고 했지, 과거의 나야?’ 같은 심정은 아니었을까.




로버트 라이언은 수업을 시작한다. 아무리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르네상스는 알겠지. 그런데 남자들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마뜩잖은 표정이다.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요, 그림에 담긴 의미를 알려주세요.’ 그들은 말한다. ‘그림에는 의미가 없어요. 혹은 그림의 의미는 보는 사람이 느끼는 겁니다.’ 선생은 힘주어 말하지만 광부들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럼 아무 의미도 없이 그림을 그린다는 겁니까?’ 자, 이 정도 되면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당신이 직접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식으로 의미를 담는지 당연히 알게 되겠지.


라이언 선생은 사내들에게 그림을 그려오라고 한다. 이렇게 광부들은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동료의 그림을 감상하는 식으로 커리큘럼을 바꾼다.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애싱턴 그룹(Ashington Group)이다.



이 연극은 2007년 영국의 극작가 리 홀(LEE HALL)이 쓴 The Pitmen Painters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알고 극장을 찾았지만, 이 극본 자체가 미술 평론가인 William Fever가 쓴 애싱턴 그룹에 관한 책을 읽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몰랐다. 즉 이 연극은 실제로 존재했던 애싱턴 그룹에 관한 이야기다. 탄광촌의 광부들이 잠시 낼 수 있는 시간에 모여 진화론을 배우고 심리학을 배웠던, 그러다 미술 감상에까지 눈을 돌렸던 실제 상황을 무대 위로 옮겨 놓았다.




노조 위원인 조지는 보수적이고 원칙을 지키려는 광부다. 그는 절차나 과정 모두 정해진 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리버와 지미는 10살 때부터 이 탄광에서 일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탄광에서 일한 것이다. 탄광에 속한 치과의 기공사로 일하는 해리는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10살 때부터 갱도 바닥을 기어 다녀야 했던 광부들에 비하면 아는 것도 있고, 교육도 받은 남자다. 그리고 한 명의 청강생이 있다. 광부는 아니지만 아마도 곧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될 토미다. 애싱턴 마을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직업은 없다.


조지는 자신의 조카인 토미에게 ‘넌 노조원이 아니니 이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원칙을 들먹이며 주장하지만, 가족 같은 삼촌들은 오히려 조지를 말린다. 아, 왜 이래. 얘가 여기서 이런 게 하루 이틀이야? 노조비? 내가 대신 내줄게. 괜찮아, 너도 수업 듣자. 이렇듯 애싱턴은 회사이자 마을이고, 노동자들의 거주지이자 공동체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다. 이제 그들의 수업이 시작된다.




멋진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 외에 이 연극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그림이다. 라이언 선생이 준비해 온 유명 화가들의 그림뿐 아니라 애싱턴 그룹의 광부들이 그린 그림들이 차례로 커다란 스크린에 띄워진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현대 영국 화가들의 그림과 조각품도 등장한다. 그림 하나하나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림의 의미? 그런 것은 관객이 자유롭게 떠올리면 될 일이다. 라이언 선생의 말처럼, 그리고 애싱턴 그룹의 광부들이 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배우들의 연기는 어느 부분 하나 흠잡을 것이 없다. 꽉 막힌 조지를 연기하는 정석용 배우도 어쩐지 속물적인 라이언 선생을 연기하는 이대연 배우도 원래 본인들인 듯 자연스럽다. 끊임없이 자신의 재능에 대해 고민하는 올리버 역의 박원상 배우는 우리 자신 같다. 좋아하는 일을 앞에 두고 내가 일을 잘하고 있나, 이 일에 과연 재능이 있나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리버는 자신의 열정과 재능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순박한 지미 역의 오용 배우와 자본주의의 폐단에 대해 화를 내는 해리 역의 오대석 배우는 이 연극에서 재미를 담당한 숨은 공신들이다. 분량은 적지만 헬렌을 연기한 송선미 배우와 수잔 역의 노수산나 배우를 빼면 이 연극은 활기를 잃었을 것이다. 토미 역의 김두진 배우는 영국의 젊은이가 전쟁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 시기를 배역으로 만든 영국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세계 대전이 아직도 영국인들에게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제 식민지 시대가 아직도 그런 의미이듯 말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시선을 붙잡지만, 현실의 이야기를 옮긴 탓에 극적인 긴장감을 주거나 시종일관 웃음이 터지는 작품은 아니다. 광부들의 모습과 생각, 그들이 그림에 대해 품었을 마음들을 들여다보면서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작품이다.


애싱턴 그룹은 성공했다. 시대적인 원인도 있을 것이고 광부들 각자가 지닌 매력에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일하고, 대화를 나누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인정받았다.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극의 마지막, 자막으로 올라가는 내용을 바라보면 몸이 굳는다.




애싱턴 그룹의 이런 ‘화양연화’ 같은 아름다운 시기는 이어진 보수당의 집권 이후 사라졌다. 대처 수상은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꿈을 지킬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보수당 집권 이후 탄광 지역과 더 나아가 영국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켄 로치의 감독의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정부가 1주일에 최대 52시간까지 허용되던 노동시간을 80.5시간까지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가뜩이나 잠이 부족해 눈이 시린데 목에서 쓴 물이 넘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연극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 이런 시간도 곧 사라질지 모르겠다는 암울한 생각을 떠올렸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과 노동력뿐인 노동자들의 삶은 노동자가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합의와 연대를 통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통해 10살 아이가 노동하지 않도록 만들었고, 적어도 저녁에는 그림 그릴 시간을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함께 진화론과 심리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예술을 자신들 생활의 일부로 편입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과정들은 있는 자들이 자비롭게 선물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어렵게 획득한 것들이다.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쉽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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