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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07. 2022

스푸트니크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오후가 지날 무렵 극장에 일찍 도착하기 바란다는 문자가 왔다. 티켓 수령 후 좌석을 지정해야 하고, 늦게 도착한 관객은 입장이 불가하다는 내용이었다. 자유석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이런 마음으로 버스를 탔다.




극장에 들어서면 검은 의자들이 보인다. 안쪽에 서너 개의 의자가 무심하게 놓여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원을 지어 놓인 의자들이 동심원처럼 퍼져 나간다. 의자와 의자 사이는 누군가 걸어서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간격이 있다.


관객은 좌석을 지정하면서 자신의 궤도를 선택할 수 있지만, 일단 정해지고 나면 방법은 없다. 수성이 자신의 궤도를 돌 듯, 지구가 토성의 궤도를 탐내지 않듯 각자의 궤도에만 머물러야 한다. 동행과 손을 꼭 잡고 극장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극장의 불이 다시 환해질 때까지 관객은 각자의 궤도에서 오롯이 혼자여야 한다.




네 명의 배우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고유한 궤도를 돌던 행성이 우연히 근접하는 것처럼 이들은 만났다 멀어진다. 행성이 너무 가까워지면 각자가 가진 중력에 의해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파괴될 것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다.


어떤 배우들이 가까워질 때, 다른 배우들은 관객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는다. 자신들의 궤도에 머무는 것이다.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머물다 만난다. 다시 말하지만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배우들은 대사를 하는 중에도 마주 보지 않는다. 시선을 교차하지도 않는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이야기하고 멀어진다. 그뿐이다.


이 연극에는 네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이름은 없다. 광활한 우주의 행성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을 리 없다. 뭐 T-1347899나, AB6NTX같이 분류표는 가능할 것 같다. 남자 1, 여자 1, 혹은 회사원, 군인 같은 것이 그들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한 남자는 회사가 소개해 준 센터에게 상담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이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지친 표정의 남자이지만 말투는 사뭇 공격적이다. 심리 상담사와 회사가 자신을 향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리 상담사의 얼굴도 마냥 환하지는 않다. 매뉴얼에 따라 고객을 응대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공격성에 짜증이 나는 것이다. 남자에게는 집이 없다, 혹은 많다. 회사에 근무하는 16년 동안 내내 출장을 다닌 덕분이다. 그는 출장길 공항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전쟁으로 시멘트 무더기만 남아 뒹구는 고향을 탈출하려는 여자다. 여자는 임시 수용소에서 그곳을 운영하던 미군 병사 하나와 가까이 지냈다. 이렇게 네 명의 배우는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은.


남자의 ‘지금’은 어둡다.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힘들다. 심리 상담사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나아지게 하기 위한 제안을 해주지만 정작 상담사 자신의 ‘지금’도 불만족스럽긴 마찬가지다. 다른 직장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파괴된 자신의 고향을 버렸다. 그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 낯선 땅에 와서 총을 들고 수용소를 지키는 미군은 돈을 벌기 위해 온 것뿐이다. 눈앞의 여자가 병사의 고향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곳에 산 적도 본 적도 없다.


네 명의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불만족스러운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곳을 탈출하고 싶어 하고, 더 나은 곳을 꿈꾼다. 보통의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우주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듯이 이 연극 속 시간도 뒤죽박죽이다. 앞의 이야기와 뒤 이야기의 시간이 뒤틀려 있거나 인과관계가 나중에 밝혀진다. 이럴 경우 관객들은 보통 ‘어렵다’고 말하는데, 이야기 전개가 명확해서 연극이 끝난 후 한숨을 돌리고 떠올려 보면 대부분 이해가 되는 내용일 것 같다.


저들의 이야기가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수용소에 살던 그녀는 미군과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다. 혹은 공항에서 만난 남자가 그녀를 지켜줬을 수도 있다. 심리상담을 받으며 남자의 상태가 자유로워졌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꿈꾸고 영화는 우리의 희망에 기꺼이 답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이 연극처럼 말이다.




서로 마주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우들은 모두 방백을 늘어놓는 셈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대화다. 그들은 거리를 둔 채, 시선을 돌린 채 대화를 이어 나간다.


감정 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들의 말에서 풍경이 떠오르고 어떤 공간이 펼쳐지는 경험이 가능하다. 선명균 배우는 정말 회사 생활에 찌든 것 같은 재미없는 표정으로 날카로운 말들을 푹푹 잘도 해댔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문현정 배우는 그런 남자를 달래고 어르다 못해 선을 넘는데 그게 또 이해가 된다. 전쟁과 폭격을 피해 고향을 탈출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당당하고 낙관적일 수 있을까. 신사랑 배우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현실성이 떨어져 보였을 것 같다. 철없고 꿈은 많은 군인이 돌아와 우버 기사가 된 것일까 잠시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김세환 배우가 연기한 배역은 두 개였던 것 같다. 병사의 남은 기간과 여자의 탈출 시간을 계산해보면 동일인물일 리는 없다. 어쨌든 그는 자신과 우연히 조우한 사람들에게 여유와 유머, 따뜻함을 준다.




연극을 소개한 포스터에는 강아지의 얼굴이 있다. 스푸트니크는 옛 소련이 띄웠던 우주선 이름이고, 그 안에는 ‘라이카’라는 개가 탑승했다고 한다. 라이카는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그곳에 태워졌고, 우주를 여행한 최초의 생명체가 되었다. 그렇게 우주로 튕겨져 나가 지구를 바라보면서 라이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처럼 이 연극에는 ‘개’의 이야기가 여러 곳에 등장한다. 그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도무지 남 일 같지 않다. 멋대로 뛰어다니다 지뢰를 밟을 수도 있고, 단순한 변덕으로 총에 맞을 수도 있으며, 자유롭게 뛰어다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타인이 원하는 곳에 머무는 것만이 안전한 일이다. 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금의 내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쌍한 라이카.


이 연극의 배역 중 누구도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걸음 타인의 궤도로 발을 들여놓기가 저렇게 힘겨운 일인가….. 지켜보는 것만도 상당히 고독한 일이었다. 70분의 시간 동안 뼈가 저릿한 느낌이 들 정도로 외로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20년도 전에 발표된 델리스파이스의 [우주로 보내진 라이카]라는 노래를 찾아 들었다. “숨 쉴 공기도 없는 사방이 꽉 막힌…….” 노래의 한 구절처럼 그런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나에게 딱 맞는 연극이었다. 당신의 궤도는 안전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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