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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02. 2022

맥베스 레퀴엠

-국립 정동극장

‘멀티버스’가 한창 유행이니, 어느 다중 우주 속에는 저런 광경이 펼쳐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1차 세계대전 후의 재즈바에서 스코틀랜드의 왕과 장군들이 축배를 드는 것 말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왕이 없어진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이고, 당연히 우리 우주의 시간에서는 그들이 왕위 다툼을 벌일 일도 없다(물론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스코틀랜드에 왕이 있었지만). 하지만 어느 우주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 우주에서도 맥베스 장군이 던컨 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 왕위를 빼앗는 일이? 하지만 암살자가 뱅쿠오 장군은 총으로 쏴 죽이는 일이? 번번이 던컨 왕만 죽어서야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뭐 어때.




이 연극은 국립 정동극장이 매년 한 명의 배우를 주목해 만드는 ‘연극 시리즈’ 중 하나다. 지목된 배우는 연기뿐 아니라 작품 선정이나 연출에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에는 송승환 배우의 [더 드레서]가 공연되었다. 올해의 주인공은 뮤지컬로 유명한 류정한 배우이고, 아마도 그는 이 무대를 자신의 첫 연극 무대로 결정한 것 같다. “대한민국 대표 뮤지컬 배우 류정한, 20여 년 만의 연극 무대 도전”이 이 연극의 광고문구이기 때문이다.




‘레퀴엠’은 죽은 이들을 위한 위령 미사곡 정도의 뜻이 있다. 즉 이 연극의 제목 [맥베스 레퀴엠]은 극 중에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위령 미사곡이란 뜻을 품고 있는 것일 게다. 권력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나눌 수도 없다. 당연히 눈에 보이는 자, 스치는 자, 혹은 미래에 문제의 싹이 될 수 있는 자까지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 웅장한 레퀴엠이 필요하다.


이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기본으로 한다. 원작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비중이 떨어지는 인물 몇이 사라진 것이 다를 뿐, 서사 구조나 이야기 진행 방식은 비슷하다. 혹시 멕베스를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최대한 스포는 자제하겠다.


먼저 예언이 있었다.




2022년에도 누군가는 예언을 듣는 것으로 모라자, 예언자로 알려진 인물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판이니, 맥베스가 예언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이 ‘왕이 된다’는 예언이니 맥베스 부인까지 정신줄을 놓는 것은 일견 타당한 반응처럼 보인다. 그들의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죽고 죽는다. 웅장한 레퀴엠을 울려 주세요.


원작에 충실하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멕베스와 그의 부인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가 일상 용어가 된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다. 현대의 예언 추종자들은 딱히 죄책감이란 것도 없어 보이던데…… 그래도 부부는 ‘인간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맥베스는 정말 맥베스 부인의 대사처럼 “당신은 훌륭하게 되길 원하고 야심도 있지만, 그것에 필요한 잔인성은 없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사는 것이 팍팍하니 저렇게 화려하고 멋진 무대를 보고 있는데도 이 정도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연극 관계자 분들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이 연극이 딱딱한 정극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화려한 재즈바는 곧 거대한 파티장으로 바뀌고, 그런 곳에는 춤과 노래가 빠질 수 없다. 무대 한쪽에 자리한 피아노는 극의 긴장감과 흥겨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주연인 류정한 배우와 안유진 배우(이분도 뮤지컬 배우다)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노래를 부르고 퍼포먼스를 한다. 그러니까 뮤지컬 적인 바닥을 쭉 깔아 놓은 후 ‘나만은 절대 노래하지 않겠어’라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무대와 의상 모든 것이 화려하다. 지금까지 본 중 가장 스타일리시한 멕베스였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시국과 어울리는 지점도 있어서 생각이 많아진다. 예언으로 흥한 자의 말로를 알고 싶다면 권할 수 있는 연극이다. 맥베스는 두 번의 예언을 듣는다. 예언으로 흥한 자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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