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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01. 2022

-한양 레퍼토리씨어터

감사하게도 연극 [벗]의 프레스콜에 초대받았다. 이 연극은 북한 소설가 백남룡의 작품 [벗]을 연극화한 것이다.


북한이라…… 그곳은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지만, 제일 먼 나라이기도하다. 아프리카의 잘 모르는 나라, 중동의 어느 분쟁 지역, 저 멀리 배를 타고 끝도 없이 가는 섬나라를 마음만 먹으면 나는 갈 수 있다. 위험 지역일 수도, 비자가 필요할 수도 있고, 전쟁터라 다녀온 후 구속될 수도 있지만 일단 갈 수는 있다(와서 겪을 일은 그때 생각하기로 하자). 하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다. 그곳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도통 갈 수도, 바라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곳이다. 정말 마음에서 먼 곳이다. 그런 곳의 생활을 어느 단면이라도 보여주는 작품이 상연된다는데, 가볼 수밖에…….




1988년 평양에서 활자화된 [벗]은 2011년 프랑스에서 번역 출판되었고(당시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라고 한다), 2020년 미국에 선을 보여 <라이브러리 저널>이 선정한 ‘2020년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고 한다. 외국의 상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는 정도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작품을 찾아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와 북한의 사회에 대해 비교할 정도의 지식이 내겐 없다. 물론 우리나라 사정은 잘 안다. 북한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다. 3대째 내려오는 세습 권력에 관한 것도 이해가 안 될뿐더러 사회주의라고 하기엔 어딘가 요상해 보이는 체제도 도무지 나의 이해밖에 있다. 하지만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1부 1 처제의 나라이고 보면 적어도 ‘사랑’에 관한 것은 비슷하리라고 생각했다. 뭔가 조금 다르긴 할 것 같았지만…..




불이 켜지면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반도네오니스트다. 그가 무대 한쪽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니까 연극은 반도네온 소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뭔가 아득하고, 아련하고, 현실과는 한 걸음쯤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연극은 채순희와 정진우의 대화로 시작한다. 정진우는 판사다. 채순희는 이혼 소송을 위해 그를 찾아왔다. 채순희와 그의 남편 리석춘의 결혼 생활을 들여다보면서 정진우 판사는 그의 아내인 육종학자 한은옥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이런 이야기다.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이 연극의 배경은 1984년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0년 전이다. 요즘은 이혼이 별 일 아니지만, 1984년의 우리나라에도 이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어떨까? 과거 러시아가 ‘소비에트 공화국’이었던 시절, 레닌에 의한 혁명이 성공한 직후 러시아에서는 남녀평등도, 이혼도 별난 일이 아니었다. 그럼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북한도 그럴까?




정진우는 채순희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본다. 그녀는 그 지역에서 제법 잘 나가는 연예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정진우는 그녀의 남편을 불러 대화를 나누고, 남편의 공장에 가고, 그녀의 직장에 가서 이야기를 듣는다. 가정은 국가의 가장 작은 단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다. 느껴지는가? 그런 와중에 연예인인 그녀가 일개 선반공인 남편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 것을 보면, 이건 또 이해가 된다. 뭔가 다른 듯 같은 모습이다.


아내는(채순희뿐 아니라 한은옥도)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남편의 옷을 빨고, 밥을 차리고, 아이를 혼자 돌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남편이 자신을 도와 부엌일 하는 것에 화를 낼 정도다. 자, 자….. 40년 전이라고요, 이해합시다!


말하자면 이 연극은 눈앞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지나온 세계와 좀 닮긴 했지만 어쩐지 많이 다른 것 같은 일상이 펼쳐진다. 썸을 타고, 그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콩당대고, 결혼식을 하고, 피로연을 하는 것은 같지만 ‘많은 다름’이 그 안에 녹아 있다.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생각이 있구나’라고 끄덕일 정도의 가치는 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그런 것들을 배우곤 하니까.




인터미션 없이 130분 동안 이어지는 연극이지만 출연진, 특히 조연들이 주는 소소한 웃음으로 길다는 느낌 없이 감상할 수 있다. 이혼을 하겠다는 부부와 그것을 판단하겠다는 재판관이 웃겨서야 말이 안 된다. 대신 많은 조연들이 웃음을 준다.


정진우 역의 정나진 배우는 잠시의 틈도 없이 거의 모습을 드러낸다. 극의 무게를 단단히 잡고 있다. 순희 역의 이송이 배우는 사랑에 빠진 순박한 노동자의 모습과 남편과 ‘생활 리듬이 맞지 않아’ 고통받는 여성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아내의 변한 모습에 어쩔 줄 모르는 리석춘 역의 문종철 배우의 모습도 낯익다. 사랑이 식어갈 때 통보받는 쪽의 모습은 그랬던 것 같다. 이유를 모르니 화를 내고, 좌절한다. 가정이 국가의 가장 작은 조직이던 그렇지 않던, 사랑이 식어갈 때 남녀가 보이는 모습은 마찬가지다. 이유는 있다. 말로 하기 힘들 뿐이다. 작은 비난과 실망이 쌓여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리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은 다르지만 끝의 모습은 대부분 비슷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 중 눈에 띄는 부분은 그 ‘이유’를 결국 정진우 판사가 밝혀낸다는 점이다. 흐흠, 그렇단 말이죠. 그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단 말이죠. 어쩐지 탐정 소설 같은 느낌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느냐 하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연극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소설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결론이다). 그 결론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일 것이다.




원작과 달리 채송희와 리석춘의 아이는 ‘딸’이다. ‘아들’인 원작과 달리 ‘딸’로 설정한 이유가 뭘까? 극을 보는 내내 생각했지만 합당한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다. 딸의 모습은 인형으로 표현된다. 그 이유도 모르겠다. 어차피 50대의 정진우와 20대의 정진우를 같은 배우가 하는 마당에 7살 아이의 배역을 어른이 한다고 큰 무리는 없었을 텐데…..


소설을 연극으로 바꾸다 보니 인물들의 방백이 많다. 설명이 조금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해설’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인물들의 느낌과 배경을 설명한다. 사실, 그 정도는 안 들어도 무리가 없다. 해설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극 마지막에 밝혀지지만, 과연 꼭 필요한 장치였는지는 의문이다.




이 연극에는 두 분의 ‘북한말 원어민’이 등장한다. 북한에서 온 배우들이라고 한다. 아마 배우들의 대사는 이분들의 조언을 받은 듯하다. 경상도 말과 전라도 말을 구별하는 나지만, 함경도 말과 평안도 말까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분들의 등장으로 다른 배우들의 북한말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고나 할까.


우리는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써가며 여행을 떠난다. 여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의 세상이 존재한다. 아주 조금만 이동하면 된다. 서울, 혜화동으로, 130분의 시간만 투자하면 그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여행 한번,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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