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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ul 21. 2023

스포 절대 금지

연극 <2시 22분 - A GHOST STORY>

무대는 주방과 거실이 이어져 있는 넓은 곳이다. 두 공간의 경계에 나무로 만든 4인용 테이블이 놓여 있다. 거실은 아직 공사가 완료되지 않아 밖에서는 열 수 없는 넓은 베란다와 이어져 있다. 그 옆으로 화장실 문, 그리고 집의 나머지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보인다. 아직 인테리어가 다 끝나지 않았는지 바래고 낡은 벽지가 절반쯤 남은 거실은 그래서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는 느낌을 준다


무대 왼쪽에는 커다란 디지털시계가 붙어 있다. 불이 꺼진 후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미친 듯이 질주한다. 빠르게 변하던 숫자는 속도에 못 이겨 지지직거리며 에러를 일으키다 마침내 멈춘다. 


새벽 02:18분. 


제니가 벽에 페인트 칠을 하고 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모니터를 흘끔 바라본 제니가 아이 방으로 이어진 통로 쪽으로 사라진다. 비명 소리, 그리고 암전. 




이 연극의 제목은 <2시 22분 - A GHOST STORY>다. 그러니까 “새벽 2시 22분에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라고 정의한들 스포 했다고 혼이 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정보로는 조금 부족하다. 거대한 모래성을 쌓은 후 옆을 조금씩 파 내는 게임처럼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겠다. 


Danny Robins이 쓴 이 작품은 2021년 여름 영국 무대에 처음 올려졌다. 아주 따끈따끈한 작품이라는 말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대를 떠올려야 할 필요도, 빅토리아 풍 음산한 조명이 만든 빈 공간을 염두에 둘 필요도 없다. 마녀 사냥도, 안개가 내려앉은 저수지에서 걸어 나오는 흰 소복을 입은 처녀 귀신도 없다.


제니와 샘 그리고 그들의 아이가 이사 온 곳은 아직도 근처에 여우가 어슬렁거리는 동네에 있는 낡은 집이지만 이미 새롭게 거듭났다. 화장실은 최신식이고 값비싼 소모품들이 가득하다. 넓은 주방도 새로 맞춘 기구들로 반짝반짝하다. 집의 구조 역시 이전과 완전히 다른데, 천문학을 전공한 샘이 별을 보기 위해 벽 하나와 천정의 일부를 통창으로 바꿔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 방에는 언제라도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인공지능인 ‘SIRI’는 명령에 따라 거실의 조명을 조절하고 음악을 내보내고 대화를 한다. 즉 무대는 나와 당신, 혹은 현재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거실과 다를 것이 없다. 매우 현대적이고 안락한 모습이다. 



이곳으로 샘의 친구인 로렌이 새로운 남자친구인 벤과 함께 초대를 받아 찾아온다. 샘은 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천문학교수인 샘과 정신과 의사인 로렌은 과학을 함께 공부한 대학 동기다. 그런데 그런 로렌의 남자친구가 고작 가정집 화장실 시공을 하고 집수리나 하는 벤이라니. 하긴 벤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태껏 로렌이 사귀었던 남자들이 모두 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렌은 왜 저렇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들만 만나는 거야?


샘은 자신의 불만을 감추지 않는다. 말속에서, 말과 말 사이에서 벤을 무시하고 경멸한다. 적극적이고 사람 좋아 보이는 벤은 샘의 말 안에 숨겨진 것들을 알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물러서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흐르지만 어쨌든 샘과 벤은 집주인과 손님의 관계다. 둘 사이에 로렌도 있다. 대놓고 무시하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는다. 아주 조금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그 여지를 잡고 제니가 입을 연다. 며칠 전부터 새벽 2시 22분만 되면 2층 아이방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려. 야, 너까지 왜 이래? 샘은 버럭 화를 낸다. 엄밀한 과학과 합리주의에 의거해 조목조목 제니의 말을 반박한다.


정말 무서웠겠어요. 오히려 로렌과 벤이 제니의 말에 흥미를 보인다.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로렌과 벤은 공감과 이해를 보내는데, 정작 남편인 샘은 무시한다. 넌 네 와이프 말을 못 믿어? 제니가 폭발한다.


어느덧 한밤중의 이상한 소음은 ‘믿음’과 ‘신뢰’의 문제로까지 번진다. 이제 방법이 없다. 네 사람은 2시 22분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제니의 말에 따르기로 한 이들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와인을 마신다. 잠을 깨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그러다가 술을 마시고 또 차를 마신다. 이들이 선택한 음료만 정신없는 것은 아니다. 귀신과 영혼에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계급과 비과학론자들, 기후 위기와 난민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영리하다. 



 

배우들이 인사를 하는 무대 위로 ‘스포 절대 금지’라는 문구가 떠 있다. 맞다, 스포 안 된다. 절대 금지다. 이건 배우와 관계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뒤에 극장을 찾을 관객을 위한 의무다. 130분의 시간 동안 조명과 음향이 너무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극장을 찾았다면 심장에 무리가 올 수도 있다. 그 점은 명확하게 밝히고 싶다. 내용보다 소리와 음산한 조명에 놀란다. 한 방은 뒤에 온다. 너무 초반에 힘 빼지 마시기를. 


번역 초연극의 경우 10중의 9는 번역 어투가 귀에 거슬려 난감한데 이번 연극은 위화감 없이 내용이 쏙쏙 들어와 박혔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 인터넷 공연 정보를 뒤져 황석희 번역가가 번역과 윤색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그렇지. 이건 전문가의 손길이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관객은 편안하고 조금은 긴장한 마음으로 극장을 찾으면 된다. 때마침 날은 덥고 습하다. 팔 위를 타고 오르는 소름은 더위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작가는 관객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여러 군데 떡밥을 뿌려 놓았다. 샘과 제니, 샘과 로렌, 또한 로렌과 벤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반전의 주인공을 유추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극장을 나서며 아, 그 대사와 장면이 다 복선이었구나 하며 허벅지를 치게 되는 즐거움과 함께. 이 연극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9월 2일까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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