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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ul 24. 2023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독일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티브이에서 꽤 다뤄졌기 때문이다. 나치 서열에서는 ‘괴링’이나 ‘괴벨스’에 견줄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과 비슷할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느낌이다. 악한 정도로는 가스실을 발명한 ‘글로보크닉’이나 유대인 학살의 최고 책임자였던 ‘힘러’보다 지독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들에 비해 현대에 더 알려졌다. 


히틀러나 괴벨스 같은 나치의 핵심 멤버들이 패망하기 전 자살하거나 구금 중 자살 내지 처형당한 것에 비해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 무려 1960년에야 나치의 잔당을 수색하던 이스라엘 첩보 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된다. 


1961년 이스라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을 독일계 유대인이자 미국으로 망명한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지켜본다. 그 결과로 1963년에 출판된 책이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이 책에 영감을 받아 이탈리아의 작가인 스테파노 마시니(stefano massini)는 희곡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되는 곳에서>를 쓴다. 실제로는 재판정에 선 피고와 관객석에 앉아 지켜본 것이 전부였던 두 사람이 실제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이다. 만일 두 사람이 실제 대화를 나눴다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무대 왼편에는 타자기가 놓인 책상이 있다. 오른편에는 여러 사람들이 것으로 보이는 트렁크가 쌓여 있고 갈색곰 인형 하나가 놓여 있다. 무대의 벽면에는 작은 사각형 구멍이 몇 개 뚫려 있다. 막이 오르면 무대 벽으로 참호전과 폭격 같은 2차 세계 대전의 영상이 지나간다. 구멍으로는 흰 연기가 새어 나온다. 꼼짝할 수 없는 관객들이 그 연기의 종류에 따라 어떤 결말을 맞게 될 것처럼. 


이제 아이히만과 한나 아렌트가 대화를 시작한다. 한나의 질문에 아이히만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한나는 ‘악이 시작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한다. 평범한 생각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악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그 ‘순간’은 존재할까? 한나는 아이히만의 출생부터 살아온 삶의 순간순간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어떤 ‘순간’에 그가 악으로 돌변한 것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내가 원한 것은 승진이었어요.”


아이히만은 자신이 원한 것은 유대인을 죽이는 것도, 추방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저 군인으로서 더 높은 지위, 더 좋아 보이는 자리로 승진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오히려 한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어요. 정육점에서 햄을 자르는 사람은 돼지를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아이히만의 말은 거침없고 막히는 법도 없다.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쪽은 한나다.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누군가 그 일을 했을 겁니다.”


이런 대사는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일제 강점기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을 공격했지만 해방 후 합참의장까지 지냈던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백선엽은 지금도 현충원에 묻혀 있다. 한나 아렌트가 한국인이었다면 아이히만의 말에 그렇게 충격받았을 리가 없다. 한두 사람이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뭘. 




극장을 찾은 이유는 작년에 무대에 올려졌던 스테파노 마시니(stefano massini)의 <7분>을 흥미롭게 봤기 때문이다. 역시 <7분>을 만들었던 극단 파수꾼이 이 작품도 무대에 올린 것이다. 얼마나 멋진 대결이 펼쳐질지 흥미진진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기운 빠진 무대였다. 김수현 배우는 느물 느물하지만 일면 거침없는 아이히만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가 문제다. 한나는 시종일관 화를 낸다. 인터뷰어로서 아이히만의 입을 열게 해서 어떻게든 정보를 모아보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질문을 한 후 대답하는 아이히만의 말을 비꼬고 깐죽대다 화를 낸다. 너무 화가 나 소리를 지르는 나머지 대사가 입으로 다 나오지도 못하고 뭉개진다. 어이, 한나. 이 사람 말도 좀 들어 봅시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대본 자체는 한번 찾아 읽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권력이란 멋대로 남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은 대사는 곱씹어 볼 만하다. 하지만 좋은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고 꼭 훌륭한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무대는 쉽지 않다. 보이지 않는 매우 여러 가지 힘들이 합해져야 최고의 무대가 나온다. 오늘도 최고의 무대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연극 관계자 분들께 박수를 보낸다. 이 연극은 8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 111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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