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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ul 27. 2023

인생이라는 거대한 아이러니

3일간의 비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을 잘 수 없다며 비명을 지른다.


불이 켜지면 아름다운 골목 옆에 자리 잡은 썰렁한 아파트 내부가 보인다. 부엌이 딸린 복층형 구조의 집 안은 한동안 비어 있던 듯 낡은 침대와 박스들만 흩어져 있다. 침대 시트도 없이 매트리스 위에서 뒹굴며 소리를 지르던 남자는 벌떡 일어나 관객들을 향해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남자의 이름은 워커. 이 이름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 걷는 사람, 방랑자, 산책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남자는 아버지 네드 제인웨어의 장례식날 사라졌다 1년이 지난 지금, 유언장 발표일에 맞춰 갑자기 나타났다.


건축을 전공한 워커는 아버지에게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장례식 날 사라지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무대 위의 낡은 아파트는 아버지 네드와 그의 동업자였던 테오가 처음 사무실을 운영한 장소다. 무슨 이유인지 아버지는 그 공간을 처분하지 않았다. 워커는 그곳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첫 장은 “1960년 4월 3일 – 5일. 3일간의 비”로 시작한다.




이 공간으로 누나인 낸이 찾아온다. 이제부터 남매는 변호사 사무실로 가서 아버지의 동업자이자 친구였던 테오의 아들 핍과 함께 유언장 내용을 들어야 한다. 아버지들이 동업자인 동시에 절친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세 사람은 마치 한 가족처럼 지냈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건축을 공부한 워커와 달리 건축가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은 핍은 배우가 됐다. 명성이 높은 배우는 아니다. 그저 그런 평가를 받지만 티브이에 출연하는 인기 배우다.


남매의 아버지 네드는 그야말로 당대를 풍미한 건축가였다. 눈을 돌리면 도시 곳곳에 그가 만든 건축물들이 보인다. 37살 젊은 나이로 테오가 죽은 후에도 네드 혼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중 네드가 부모님들을 위해 만든 집이자 네드와 테오 콤비가 만든 첫 작품인 제인웨어 하우스는 가장 유명하다.


인생이 엉망으로 꼬였다고 생각하는 워커는 그 집을 상속받을 생각에 부풀어 있다. 그 집, 아버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인 그 집만 손에 넣는다면 어떤 종류의 영감이 워커의 인생에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네드는 그 집을 테오의 아들인 핍에게 물려준다. 이렇게 연극은 시작된다.




연극은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언장 공개를 둘러싼 사건 속에 있는 1995년의 시간이 1막이고 인터미션 후 1960년으로 뒷걸음질 쳐 2막이 시작된다. 네드의 아들인 워커와 딸인 낸, 테오의 아들인 핍은 2막에 각각 네드와 라이나, 테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35년은 어떤 사람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어떤 자식도 부모의 젊은 시절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부모 본인이나 관련 인물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다른 이야기 속 배경으로, 지금의 모습을 바라보며 유추하는 정도로만 그 시간들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부모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나도, 당신도 저지르는 오류다. 누군가의 일생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현재의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1부의 이야기 주인공이 자식들이라면 2부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모들이다. 이야기를 역전해서 배치한 이유는 ‘누군가의 인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래전 일들이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선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워커는 아버지의 일기장에 근거해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알게 됐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그날의 진실을 일기장을 읽는 정도로 알아낼 수 있을까?


이 연극을 관통하는 것은 세 사람의 연애담이다. 그 연애로 인해 세 사람의 운명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운명이 엇갈렸다. 행복의 끝이 불행의 시작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누군가의 절망이 다른 이의 행복이 되기도 한다.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커다란 죄책감이 되어 나머지 인생 내내 영향을 준다. 아이러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불행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니까.




1998년 미국에서 초연된 리처드 그린버그의 이 작품은 내게 우디 앨런의 영화를 떠오르게 했다. 등장인물들은 수다스럽고 신경질적이다. 많은 대사가 쏟아지지만 어쩐지 뭔가 빠진 느낌이다. 원작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비유나 굳이 표현하자면 '우디 앨런 식 유머'가 사라진 느낌을 받았다. 혹시 번역 중에 삭제된 것일까?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지나치는 말속에서 등장인물의 성적 취향이나 감정, 그렇게 행동한 이유들이 농축되어 설명된다. 빠르게 잡아채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배우들이 마이크를 사용하기 때문에 극장의 어디에 앉아 있든 잘 들리긴 하지만 워낙 많은 대사가 쏟아지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있다.




무대 세트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1부의 무대는 30년 이상 비어 있던 삭막한 아파트지만 충분히 아름답다. 인터미션 중에 스태프들이 무대 위로 나와 분주히 움직인다. 생명 없이 버려져 있던 아파트에 삶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책이 쌓이고 침대 위에 색감 있는 이불이 덮이고, 러그가 깔리고 색이 예쁜 소파가 들어온다. 눈 앞의 늙은 부모를 보면 감정 없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지만 35년 전의 그들은 아름답고 활기 있고 생명력에 넘쳤다. 2부의 공간이 그런 것처럼.


1부와 2부를 같은 배우들이 다른 배역으로 연기하다 보니 그 변화를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워커와 차분한 네드를 연기한 박정복 배우도 훌륭했지만 귀여운 핍과 잘생긴 테오를 연기한 김찬호 배우도 멋졌다. 이 작품을 통틀어 가장 어른스러운 핍의 모습에 1부에서 큰 위안을 받았다. 게다가 2부에서 그 비를 몽땅 맞아 버리다니. 낵과 라이나를 연기한 정인지 배우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어리고 아직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젊은이였다면 이 작품의 주제가 더 절실히 와닿았겠으나 우울한 늙은이가 된 내게는 ‘흠, 인생이란 게 다 그렇지’라고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감흥이 있었다. 연극 자체는 훌륭했다. 무대도, 무대 효과도, 배우도 훌륭하다. 관객인 내가 너무 늙은 것이 흠이었을 뿐. 이 연극은 이해랑예술극장 10월 1일까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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