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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Aug 08. 2023

웃어보자, 이 황당한 세상 속에서도.

뮤지컬 구텐버그

막이 오르기도 전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배우들이 직접 나와 소품들을 정리하고 피아노에 맞춰 목소리를 가다듬느라 분주했기 때문이다.


미리 온 관객들을 위한 배려만은 아니다.




오늘 무대는 더그 사이먼과 버드 데븐포트라는 두 명의 젊은이가 대본을 쓰고 작곡, 작사까지 한 '뮤지컬 구텐버그'의 리딩공연이다. 원래는 몇 십 명의 코러스가 동원되어야 하는 장대한 뮤지컬이지만, 그건 본편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다는 가정 하의 이야기이고! 오늘은 아름답고 화려한 미래를 위한 준비 무대다.


캐스팅을 하지 못한 더그와 버드는 직접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할 예정이다. 주연만 맡는 것도 아니다. 다른 모든 배역도 이 친구들이 담당해야 한다. 소품도, 코러스도 이들의 몫이다. 당연히 미리 나와 모든 것을 준비할 수밖에.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더그와 버드는 인쇄기를 발명한 '요한 구텐버그'에 대한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구텐버그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상상력이 나설 차례다.


중세 독일 슐리머 마을에 살던 구텐버그는 왜 인쇄기를 발명했을까? 그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구텐버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이용해 성경을 인쇄했다. 혹시 사람들이 글을 못 읽도록 만들어서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  사악한 신부가 그 마을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모든 이야기가 뮤지컬 안에 들어 있다.




너무 스포일러 하는 것 아니냐고?


2013년 초연 무대부터 빼놓지 않고 관람 중인 관객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괜찮다.


제작자로서 또한 작품의 등장인물로서 두 사람은 정신없이 무대를 누빈다.  작품의 매력은 이 두 명의 인물, 즉 더그와 버드의 티키타카에서 나온다. 그것은 미리 맞춰진 것일 수도 애드리브일 수도 있지만 뭐가 됐든 눈을 뗄 수 없이 매력적이다.



문자가 권력이던 세상이 있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통용되던 시절 즉 구텐버그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다.

지식이 권력이던 세상도 있었다.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만 기회가 열리던 의 이야기다.

그런 시간을 지나  이제는 정보가 권력인 세상이 됐다. 지식도, 주식도, 인공지능도 정보가 관건이다.


이런 흐름을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아차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무섭고 두렵고 답답하다. 글을 읽지 못해 사악한 신부에게 속고 있는 슐리머 마을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뒤처지고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마음 한쪽이 서늘해진다.


그러다 문득 문자도 지식도 정보도 아닌 도사와 법사, 풍수 같은 것이 권위가 되는 광경을 보면 몸이 굳는다. 이 황당한 세상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면 특별한 뭔가가 필요하다. 더그와 버드처럼 꿈을 꾸는 청년들의 열정적인 몸짓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뮤지컬은 진지하고 심오하지 않다. 가볍고 경쾌하고 유쾌하다. 더그와 버드를 연기한 두 배우는 넘칠 정도로 훌륭한 노래를 선보였다. 숨이 찰 정도로 열심히 연기한다. 두 배우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첫 공연이었기 때문인지 아직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조금 아쉽다. 이 뮤지컬의 매력은 가창력 좋은 노래보다는 두 배우의 합과 애드리브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아노가 함께 한다는 점도 이 공연의 매력이다. 배우의 연기와 함께 섬세한 반주가 무대를 감싼다.




순리대로 지금껏 살아왔는데 어쩌다 이런 세상에 살게 됐는지 모르겠다. 구텐버그가 이미 한바탕 떠들썩하게 세상을 바꾸고 난 뒤, 어쩐 일인지 시간이 되돌려져서 다시 중세 수도사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 기분이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이런 기분이 들 때는 이 뮤지컬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을 잊고, 현재를 잊고 잠시라도 웃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뮤지컬은 10월 22일까지 플러스씨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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