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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29. 2023

사랑은 성장하길 바라는 거야.

- 연극 [템플]

 작품이 인기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용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된 템플 그랜딘(Mary Temple Grandin)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작품.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이 연극 관람을 포기했었다. '인간 승리'나 '불굴의 의지'를 믿기에는 나 자신이 착하지 않고 의지도 박약한 지라 다른 이들의 승리 담을 보며 울컥하거나 감동을 받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난을 이겨낸 분들께 기꺼이 박수를 보낼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 특별히 시간을 내 내밀한 속사정까지 알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공연을 많이 보시는 어느 인스타 주인장의 김세정 배우에 대한 극찬에 고무되어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연극은 템플의 졸업 연설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람은 일생 중에 어린 시절을 지나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문을 걸어 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연설하는 템플 주위로 사람들이 움직인다.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감정을, 혹은 장면을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템플의 연설이 멈추고 춤을 추던 배우들이 관객석을 바라보며 외친다.

이 공연은 템플, 템플 그랜딘의 이야기입니다.

흥미롭다.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주의를 주기도 하고, 극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한다.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무대를 바라봤다. 무대 위에는 의자와 받침대로 사용되는 조형물 몇 개, 문을 형상화 한 나무틀과 그 뒤에 걸린 그네뿐이다. 이 단순한 무대 위에서 2살의 템플은 병원에 가고 학교에 간다. 기뻐하고 울고 화내고 좋아하고 그렇게 어른이 된다. 제자리에서 뛰기도 하고 누군가의 등을 타고 넘고 매달린다.


그제야 이 작품이 신체 연극 (physical therater)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체 연극은 배우들의 신체 움직임을 통해 줄거리를 '보여주는' 장르다. 당연히 배우들의 움직임이 많다. 합이 잘 맞는 움직임은 보는 사람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준다. 잘 짜이고 연습된 신체 연극은 한 편의 무용을 보는 것 같다.




줄거리는 짐작처럼 흘러간다. 자폐스펙트럼을 갖고 태어난 템플은 2살 때 이미 장애 진단을 받는다. 평생 말도 못 할 것이고 치료 시설에서 살아야 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는다. 1940년대 이야기다. 템플에게 헌신적이고 지혜로운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칼락 선생님도. 그들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가끔은 가벼운 유머를 곁들이며 진행된다.


연극은 템플의 이야기를 확장시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충고를 건넨다.


사랑은 누군가 성장하길 바라는 거야.
엄마는 네가 성장하길 바랐어.
네가 너만의 시각적 상징을 만들었다는 건
템플 스스로 성장하길 원하고 있었다는 거지.
템플이 드디어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아름다운 줄거리이지만 대단히 놀라운 결말은 아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은 독특하고 창조적이다. 다음에는 어떤 장면이 나올지 기대하게 된다.


템플 역의 김세정 배우를 극찬하던 인스타 주인장의 마음을 이해했다. 연기는 섬세했고 동작은 가벼웠다. 템플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고생하는 엄마 역의 박선혜 배우도 훌륭했고 여러 가지 역할을 두루 소화한 윤성원 배우, 이승일 배우, 김유상 배우, 노재현 배우, 윤철주 배우, 배솔비 배우 모두 엄청난 무대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탄탄한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임과 동시에 잘 짜인 무용극이기 때문이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을 편견 없이 대하는 것은 무대와 객석의 거리만큼 멀고 힘들게 느껴진다. 게다가 템플처럼 한번 본 것은 모조리 기억하는 특수한 능력이라도 있지 않는 한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는 더 힘들다.  이 연극 한 편으로 자폐를 가진 이들에 대한 생각이 새롭게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 안에 가득한 편견과 선입견을 한 번쯤 돌아볼 기회는 될 것 같다. 배우들이 지치지 않고 파이팅 해주시길 바란다. 이 연극은 2월 18일까지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1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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