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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27. 2023

당신은 혼자 걷고 있는가?

연극  WIFE

멀리서 탬버린 소리가 들리고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났다. 절반쯤 열린 막 사이로 연극 [인형의 집]을 상연 중인 1959년 영국의 어느 무대가 보인다. 무대 가운데 19세기 풍의 드레스를 입은 노라의 모습을 한 수산나가 말한다.


저는 저 혼자서 제 자신을 꾸려 나가야 해요. 그래서 저는 지금 당신 곁을 떠나는 거예요.

은근슬쩍 등장한 노라의 남편 헬메르가 말한다.


당신 정말 미쳤군


1878년 헨리 입센이 발표한 희곡 [인형의 집]의 마지막 부분이다. 노라는 아픈 남편을 위해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했다는 이유로 바로 그 남편 헬메르에게 비난을 받는다. 남편에게 자신은 귀여운 종달새고 인형일 뿐 동등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노라는 마침내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기서 집이란 물리적인 공간일 뿐 아니라 사회적, 인습적인 모든 것을 뜻한다.




박수 소리가 들리고 무대는 빠르게 분장실로 바뀐다. 데이지와 그의 남편 로버트가 수산나를 방문한다. 헨리 입센의 원작이 발표된 지 80년이 지났지만, 로버트의 입에서는 [인형의 집] 속 노라의 남편이 했을 법한 모욕적인 말들이 쏟아진다. 수산나가 두 사람을 분장실에서 몰아낸 후 다시  데이지 혼자 수산나를 찾아온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다. 혹은 사랑하는 사이였다. 이제 데이지는 선택해야 한다. 집을 뛰쳐나가는 노라가 될 것인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19세기의 보통 사람이 될 것인지.


연극 [WIFE]를 가로지르는 큰 줄기는 [인형의 집]이다. 수산나와 데이지가 만나는 1959년 무대를 시작으로 1988년, 2023년, 2046년의 무대가 이어진다. 시대에 맞게 해석은 다양하다. 드레스 차림의 노라는 현대의 복장으로 혹은 남성으로 바뀐다. 하지만 복장과 성별이 어떻든 와이프는 와이프일 뿐이다. 말하자면 이 연극은 [인형의 집] 속 와이프인 노라의 삶을 끌어와 지금 혹은 미래의 와이프, 혹은 와이프에 준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 혹은 그런 관계들에 대해 말한다.  


사전적 의미로 WIFE는 누군가의 배우자나 아내를 뜻한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사랑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허용하건 그렇지 않건 동성애는 존재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wife’라는 지위가 여성에게 차별적인 위치를 부여했다면, 동성 간에는 어떨까? 이제 WIFE는 동등한 관계를 일컫는 호칭이 되었을까?  네 개의 막을 통해 네 커플을 보여주며 이 연극은 묻는다.




이 연극은 2019년 사무엘 아담슨(Samuel Adamson)이 쓴 희곡 [Wife]를 원작으로 한다. 4개의 이야기에는 각각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들은 연관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1막의 주인공인 데이지의 아들 아이바는 2막에 모습을 드러낸다. 2막에서 아이바와 함께 등장했던 헨리의 딸 클레어가 3막의 주인공인 식이다. 이렇게 인물들은 얽히고 관련되어 있다.


1막에 등장한 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등장인물들은 나이를 먹는다. 1막에서 수산나와 사랑에 빠졌던 데이지는 29년 후 인종 차별과 동성애 반대를 서슴지 않는 극우주의자이자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있다. 2부에서 젊고 활기찼던 아이바는 3부에서는 35년만큼 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평범한 우리와 같다. 활기차고 개혁을 원하고 진보적이던 젊은이는 나이를 먹으며 보수화되고 ‘분노하지 않는 꼰대’가 된다. 어색하지 않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니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대사를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뭔가 놓칠 수 있다. 하나라도 놓치면 인물들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치명적이다. 집중력이 필요하다. 배우들은 그 길고 빠른 대사를 능숙하게 던지고 받는다. 번역체가 드문드문 귀에 거슬리게 들리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다. 도무지 저 많은 대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감탄하는 마음이 든다.


무대는 간결하다. 특별한 장치 없이 분장실 세트와 펍의 탁자, 응접실 테이블들이 간략하게 등장했다 사라진다. 인물들의 대사와 표정에 집중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무대를 절반씩 사용하지만 또한 극장 전체를 사용한다. 관객석 왼편 BR석을 예매하신 분들은 배우들이 직접 소리 지르는 광경도 목격할 수 있다.




1막에서 데이지는 선택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2막이다. 2막의 아이바와 에릭 역시 선택한다. 그들의 선택은 온전한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다. 사회적인 압력과 힘에 굴복한 부분이 크다. 어쨌든 그들은 선택했다. 3막에서 클레어와 아이바는 그들의 선택에 대해 되돌아본다. 이미 세상은 변했다. 일부 나라에서는 동성 간의 결혼도 합법이다. 하지만 그 관계 자체는 어떨까? 집을 나가야 했던 노라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혹시 그것보다는 두 사람 사이의 권력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이 작품을 통틀어 가장 희망적인 인물은 아이바가 아닐까 싶다. 그는 세상과 싸웠고 실패했고 굴복했지만 젊은 클레어의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는다. 다시 의미를 찾고 의지를 불태운다. 이들의 이야기는 연극 [인형의 집] 속 소품인 탬버린에 담겨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마침내 원을 완성하듯 크게 한 바퀴를 돌아 데이지의 기쁨과 환희의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을 뼈 아프게 깨닫게 만든다.


이 연극에는 보수적인 관객이라면 질색할 여러 요소가 뒤섞여 있다. 동성 간의 키스, 직접적인 성적 대사, 페미니즘 그 자체. 하지만 어쩌면 이런 요소들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연극이라는 장르를 거부하지 않을까 싶다.


연극은 도발적이고 질문을 던진다. 마음을 뒤흔들고 물음표를 던진다. 165분의 시간 동안 어떤 인생을 보여주며 현재 우리의 위치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 연극 와이프처럼 말이다. 이 연극은 2월 8일까지 LG아트센터 유플러스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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