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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Apr 02. 2024

2. 그 많던 우리 술은 어디로 갔을까?

디오니스소는 그리스인들이 창조해 낸 술의 신이다. 이승과 저승, 전쟁과 사랑처럼 대단하고 거대한 것들을 관장하는 신들의 무리 속에 ‘술의 신’도 당당하게 끼어 있다. 이 정도면 그리스인들의 술 사랑은 인정해 줘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 인들은 어떻게 술을 마셨을까? 그리스 시민들의 집에는 안드론(Andron)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남자들의 방’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안드론에는 남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매번 같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초대하고, 초대에 응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길을 가던 소크라테스가 초대를 받는 장면도 나온다. 물론 피리 연주자나 무희, 술 말고 다른 것을 파는 여성들은 함께 할 수 있었다.


안드론에 모인 사람들은 1인용 침대처럼 생긴 파우치에 비스듬히 누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토론이나 논쟁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래봐야 결국 주정뱅이가 되어 잠들 것을 내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집주인은 빙 둘러진 파우치 가운데 거대한 항아리를 놓는다. 와인에 물을 부어 희석시킨 것(물과 와인의 비율이 1:3 정도였다고 한다)이 그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2시간 안에 고주망태가 되는 우리의 일그러진 회식 문화처럼 ‘부어’, ‘짱’, ‘마시자’를 외쳤다가는 초 저녁에 모두 잠들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오래 마실 수 있도록 와인의 도수를 낮추는 방식을 선택했다.

파에스툼에서 발견된 벽화(BC475) 남자들이 파우치에 비스듬히 누운 채 술을 마시고 있다. 한 침대에 한 명이라고는 안했다. 뭔가 에로틱한 분위기도 엿보인다


하지만 도수 높은 술을 짧게 마시든 순한 술을 많이 마시든 결과는 같다. 파우치 위에서 잠들거나 불편한 속을 끌어안고 밖으로 달려갈 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이것이 심포지움(Symposium)이다. 이런 환경에서 얼마나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아, 물론 플라톤은 이런 술자리에서도 쓸만한 말들을 추려 ‘향연’ 같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이렇게 마셔댔으니 그리스의 와인 산업이 얼마나 흥했을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BC 17세기쯤에는 이미 와인 관련 서적이 만들어졌다. 단군 할아버지도 탁주 빚는 법에 대한 책을 남겨 주셨다면 감사했을 텐데 아쉽다.


그리스 와인 산업은 비잔틴 제국까지 이어진다. 누가 뭐라 해도 와인은 예수님의 피였다(“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마태복음 26장 28절). 몇 천년을 이어지던 와인 산업이 막을 내린 것은 15세기다. 오스만튀르크(라고 쓰고 ‘튀르키예’라도 읽어도 된다.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나란히 붙어 있으면서도 썩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다)에 의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된 후 와인 산업은 그야말로 철퇴를 맞는다. 이슬람에서 술은 금기다. 그리스 와인은 변방으로 숨은 수도원을 통해서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


이후 그리스 역사는 와인을 마실만큼 평화롭지 못했다. 19세기 독립을 하긴 했지만 내전과 독재가 이어졌다. 와인을 만들던 사람들이 후손에게 제조법을 전수하기는커녕 뜰에서 키우던 나무 몇 그루조차 지킬 수 없는 엄혹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스 와인 산업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1980년대 이후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후 그리스 젊은이들은 비로소 와인으로 눈을 돌렸다. 각국의 와이너리를 찾아가 포도의 재배 및 와인 생산에 관련된 노하우를 습득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와인산업에 뛰어들었다.


어두운 일의 반대편엔 밝은 빛의 그림자도 남는 법이다. 방치되었던 그리스 포도나무들은 19세기말 유럽 전역을 휩쓸며 거의 모든 와이너리의 포도나무를 궤멸시킨 필록세라(진딧물의 일종)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와이너리들은 필록세라를 견뎌내기 위해 미국산 포도나무를 수입해야만 했다. 덕분에 이제 유럽의 토착품종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리스는 예외다.  그리스 와이너리들은 고유 품종을 무기로 성장하고 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역사가 지난하다.




이제 우리 이야기로 돌아오자. 무엇이든 글로 남기는 그리스인이나 중국인과 달리 우리 조상들은 후세를 위해 기록을 남기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덕분에 우리 조상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중국 책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같은 것을 소환해야 한다. ‘동이전’ 속에는 “고구려 사람은 장양(장과 술 등 발효음식의 총칭)을 잘한다”라고 적혀 있다. 우리가 장과 술의 민족으로 불린 것은 몹시 오래전부터였다는 말이다.


삼국시대에도, 뒤를 이은 후삼국시대 사람들도 술을 즐겼다.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에 들이닥쳤을 때 신라의 경애왕은 포석정에 있다 사로잡힌다. 지금도 포석정의 용도가 놀이를 위한 것인지 제사를 위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지만 제사를 지냈건 놀고 있었건 술이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록’이라는 관점에 국한하자면 고려시대는 우리 선조들이 크게 각성한 시기다. 각종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무렵 문헌을 보면 술의 재료나 종류에 관한 이야기가 드디어 나오기 시작한다. 멥쌀과 누룩을 섞어 발효시킨 술밑을 눌러 술을 짜낸다는 제조 방법이나 이화주, 화주, 백주 등의 명칭들도 찾을 수 있다. 청주와 탁주, 소주 등 세 가지 전통주 체계가 정착된 것도 이 즈음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비율로 어떤 과정을 거쳐 제조하는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암흑 속이다. 제대로 된 제조법을 엿보기 위해서는 조선시대까지 기다려야 한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수운잡방], [음식디미방], [증보산림경제]등 구체적인 제조법을 적어놓은 책들이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상업의 발달이 지연된 탓에 주로 각 가정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가양주를 빚어 마셨다. 양반가를 중심으로 멥쌀에서 찹쌀로 재료의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쌀과 누룩을 섞어 발효시켜 바로 술을 짜내는 단양주법에서 덧술을 사용하는 중양주법으로의 변화도 이 시기에 나타난다.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는 다양한 방식의 술이 넓게 퍼져 있었다는 말이다. 전해진 책에 적혀 있는 술의 종류만 합해도 700종 정도가 된다. 무릇 술의 민족이라 부를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태클을 걸게 마련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주령’에 관한 기록이 간간히 등장한다.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식인 쌀을 대량으로 사용해야 했으므로 가뭄이나 흉작일 경우 금주령을 실시한 것이다. 하지만 큰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태종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비록 금주령(禁酒令)을 내렸으나, 술을 마시는 자가 그치지 않으니, 이것은 과인(寡人)이 술을 끊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술을 금지시키고 왕은 밤마다 술상을 폈다면 제대로 그 령이 살아있었을 리 없다. 하지만 저렇게 말해 놓고도 크게 잘못을 뉘우친 것 같지는 않다. 그 대신 금주령이 실패한 원인을 누룩에서 찾는다. 중종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금주령(禁酒令)이 엄밀한 듯하지만 여염에서는 여전히 술을 빚고 있으니 온갖 계책을 생각해 보아도 금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도성의 각 시장에는 누룩을 파는 데가 7∼8곳이 있는데 … 그것으로 술을 빚는 쌀은 천여 석에 이를 것이니, 그 낭비가 참으로 염려됩니다. 누룩을 못 팔게 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지만 이 같은 흉년에는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시도도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영조는 그 자신이 술을 즐기지 않은 탓인지 술 마시는 일 자체는 싫어했지만 금주령에는 미온적이었다. 대신 사도 세자가 대리로 정무를 보던 사이 금주령을 내린 기록이 있다. 다만 백성들에게만 술을 금지시키고 왕과 양반들은 홀짝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영, 정조는 금주령 속에서도 군사와 농부들이 마시는 탁주와 보리술은 허용했다.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주막이나 양조장 등이 번성하게 된다. 이 시기를 지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극에서 흔하게 만나는 ‘탁주를 파는 주모’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말에는 외국으로부터 맥주, 와인, 위스키 등 다양한 종류의 술이 수입된다. 1909년 즈음에는 술을 만드는 제조장 수가 오천 곳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내내 지배층과 피지배계급 간에 술을 놓고 밀고 밀리는 싸움이 벌어졌지만 결국 승자는 술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의 주모는 독립운동도 하시더라.


조선말 외국으로부터 이국적인 술만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 중국, 러시아, 영국 등의 힘센 나라들은 한반도에 눈독을 들이고 때때로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열강들의 싸움에 놀라 고종이 이리저리 주거지를 옮기는 사이 한반도는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다. 짖는 개는 괜찮아도 침 흘리는 개는 반드시 피하라고 하는 말을 당시 사람들이 몰랐던 것임에 틀림없다.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는 1909년 ‘주세법’을 발표한다. 모든 술에 세금을 받아가겠다는 것이 골자다. 일제는 일단 모든 술의 양조를 ‘면허제’로 바꾸고 자가 소비하는 술에 대해서는 더 높은 과세를 부과했다. 세금을 긁는 것으로 모자라 집안 전통으로 내려오는 가양주에 대해서는 제조자가 사망했을 경우 주류 제조를 금했다. 어머니가 전통주를 잘 빚었고, 그 방식을 아들이 제대로 이어받았다고 할지라도 모친이 사망하고 나면 그 가양주 제조는 불법이 되는 것이다.


이런 법을 적용한 지 25년 정도가 지난 1934년에 이르자 자가로 술을 제조하는 면허자의 숫자는 ‘0’이 된다. 가양주의 뿌리가 완전히 뽑혀 나간 것이다. 이슬람의 지배 후 와인 산업이 꺾인 그리스도 이보다는 사정이 나았을 것이다. 침 흘리는 개는 피하고 볼 일이다.




그렇다고 술을 즐기는 민족이 하루아침에 술을 끊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법을 피해 가면서 이른바 ‘밀주’를 만들어 마셨다. 쌀에 누룩을 섞어 깊숙한 곳에 숨겨두면 자연스레 탁주가 된다. 몰래 마시기 딱이다. 하지만 소주나 약주는 증류하는 과정을 거치거나 특별한 도구가 필요했으므로 점차 잊혀 갔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나빴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기 시작한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면서 한반도도 전쟁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계기로 일제는 양곡 조절 정책을 실시한다. 대량의 곡식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총독부는 술 제조 방법을 통제하여 약주 16종, 탁주 32종 만을 남겨놓게 된다. 해방 이후 곧 6.25 전쟁이 일어난다.


전 국토가 피폐해진 전쟁 후 쌀값은 치솟는다. 그야말로 먹을 쌀이 부족한 시기가 된 것이다 미군정을 통해 부족한 곡물들이 들어왔지만 세끼를 해결하기도 벅찼다. 1962년 정부는 서울 전역에 존재하던 51개 제조장을 12개의 연합 제조장으로 묶어 버린다. 지방도 사정은 비슷했다. 제조장의 숫자를 줄여 관리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마침내 1965년 나온 [순곡주 제조 금지령] 이후 막걸리 재료에서 멥쌀 사용이 금지된다. 대신 수입된 곡류를 이용해 탁주를 제조하도록 했다.


막걸리의 재료에 관한 법률은 밀가루 100% 사용에서 밀가루 70%, 옥수수가루 30% 혹은 멥쌀 100%까지 불쑥불쑥 변경된다. 재료가 달라지면 맛은 당연히 변한다. 탁주를 마시던 술꾼들의 입맛은 변화된 막걸리에 적응하기보다 공장에서 주조한 희석식 소주 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경제 상황이 나아지면서 맥주와 양주로 방향을 튼 사람들도 많았다.


1980년 이후 정부는 우리나라 고유의 술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는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보니 소개할 술이 없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각 도에 한 가지씩 우리 술을 개발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쌀 막걸리도 보급하기 시작한다. 1995년에 이르면 자가소비용 술 빚기가 허용된다. 드디어 가정에서 조금씩 빚던 술이 ‘밀주’라는 이름을 떨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취미로 술을 배우는 곳이 허용되고 짧은 유통기간을 이유로 판매 지역을 제한하던 [막걸리 판매지역 규제]도 사라진다.




물론 우리 술에 씌워졌던 규제들이 모두 풀린 것은 아니다. 어떤 행동이라도 ‘전통’이라는 틀 속에 들어오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제사’가 우리 전통에 들어온 것은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지만, 명절이 끝난 후엔 이혼율이 치솟는다는 통계가 나오는 지금도 그 자취는 여전하다. 한번 박힌 것은 뿌리 뽑기 어렵다.


하지만 전통주에 대한 인식과 소비가 확실히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2022년 기준 국내 전체 주류 출고액 중 탁주, 약주, 증류식 소주등 전통 주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13.4%에 이른다. 이는 전년 대비 73% 증가한 숫자다. 말 그대로 전통주의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있다. 그리스 젊은이들이 자국의 와이너리를 세우는 것처럼 우리 술 시장에도 젊은 양조자들의 새로운 바람이 거세다.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아직 쏟아져 나오는 전통주들의 성격과 특성을 제대로 알고 마시기가 어렵다. 모든 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장하는 전통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방문해 그 특성을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렇게 나의 술기행이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전통주 산업의 동향과 전망, 김창호 전문 연구원, KREI 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23년

한국인에게 막걸리는 무엇인가, 정혜경. 김미혜 지음, 교문사, 2012

조선주조사, 배상면 편역, 우곡출판사, 1997

전통주, 박록담 지음, 대원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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