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 Oct 30. 2024

살아남은 자들의 시간

- 연극 <시차>

2024년 한국 프로 야구 시리즈 우승팀은 기아타이거즈였다. 선수들의 플레이도 기억에 남지만 그날 마음에 가장 꽂힌 것은 우승이 확정된 직후 중계 아나운서가 했던 말이었다.


“광주, 우리 시대 가장 큰 아픔을 야구로 극복한 도시에서 타이거즈는 운명이자 자랑이었습니다.”


불쑥 눈시울이 붉어졌다. 1980년 광주에서는 아픈 사건이 있었다. 맑은 얼굴로 외출했던 가족이 돌아오지 못한 집이 많았다. 어떤 이는 사라졌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당시 그 도시의 누구도 일이 그렇게 참혹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2022년 핼러윈 축제의 기분을 느끼며 이태원을 걷던 사람들과 20114년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배에 오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대 위엔 간이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한 개에는 인형과 이불을 비롯해 많은 것들이 놓여 있고 나머지는 썰렁하다. 그 위로 시계가 움직인다. 시계는 1994년에서 1995년으로 2022년에서 2014년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병실의 두 사람, 최윤재와 최희영이 연극의 출발점이다. 




윤재와 희영은 병실의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성수대교 붕괴 뉴스를 흘려들으며 대화를 나눈다. 마치 오래된 친구 같다. 하지만 곧 퇴원을 앞둔 두 사람의 사정은 녹록하지 않다. 윤재는 연인에게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고, 희영은 아이를 데리고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궁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영은 윤재와 연인의 사랑을 응원하며 필요하다면 성수대교 사고를 이용하라고 조언한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불행을 해결하는 것이 타인의 사고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종의 계획을 짠다. 윤재는 연인에게 돌아가고, 희영은 희영대로 일을 진행한다.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살짝 벌어져서 계획이 차질이 생기긴 하지만 그래도 좋다. 어쨌든 일은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이렇듯 머리 위의 시간과 무관한 듯 흘러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들은 정말 그 참사들과 관련 없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날은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된 날이다. 그러니까 20대라면 그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30대에게도 이 사건은 낯선 것일 수 있다. 그것을 기억하기에 너무 어렸다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다. 1994년에는 성수대교가 무너져서 출근길의 시민들이 수장되었고, 1995년에는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었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994년 10월 21일의 나와 1995년 6월 29일의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똑똑히 기억한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필름 사진의 한 장면처럼 사건을 접했던 순간의 풍경이 머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도, 2022년 10월 29일도 마찬가지다. 


나처럼 그 시간이 의미하는 것을 기억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입장해도 좋다. 하지만 더 젊은 분들이라면 연극이 시작하기 전 프로그램북을 먼저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연극은 인터미션 15분을 사이에 두고 1부, 2부로 나뉜다. 1부의 시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흐른다면 2분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교차한다. 미리 시간에 대한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 일이 미래에 벌어진 것인지 과거의 이야기인지 헷갈리기 쉽다. 




사회적 참사를 소재로 다뤘다고 해서 그 사건들이 이야기들이 뼈대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과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 했고,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았다. 하지만 티브이 속에서 벌어진 일이, 그래서 타인의 아픔이고 괴로움처럼만 생각되던 일이 내 삶의 궤도와 스치고 지나간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밝고 신나는 연극은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180분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했던 시간이었다. 1부의 배우들이 다른 역할로 모두 2부에 등장한다. 배우들이 어떻게 다른 인물들을 표현하는지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묻지마 폭행을 당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윤재를 구한 것은 지나가던 타인이었다. 정신을 잃은 윤재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어와 그의 목숨을 살렸다. 그렇게 살아난 윤재가 희영에게 손을 내민다(물론 시작이 좋다고 다 끝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스포가 될까 봐 입을 다물기로 하겠다). 이런 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80년의 광주. 이제는 제법 사건의 실체가 많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그 과거를 헤집고 재를 뿌리려는 자들이 존재한다. 타인의 아픔을 어떤 이유로든 공감할 수 없는 자들이 살아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타인과 연대할 수도 있지만 타인에게 무한하게 상처받을 수도 있다. 선택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아직도 1980년의 광주에 침을 뱉는 자들은 존재한다. 2014년 진상을 밝혀달라며 단식농성을 하는 부모들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벌이던 자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2022년 이태원에서 쓰러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적인 불행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까? 혹은 용서하거나 잊으려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을 다시금 해보게 해주는 연극이었다. 


우연히(제작자들은 의도한 것일 테지만) 10.29 참사 2주기에 이 연극을 보았다. 아직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누구 한 사람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않은 채 2년이 흘렀다. 그런 의미로 이 연극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연극은 11월 1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만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도의 방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