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걸 다 공부시키는 나라

- 세상이 나를 지치게 할 지라도

by 지안

고등학교 때 공부를 안 했다. 340점 만점 시험에 두 자리 점수를 받았으니 뭐 할 말도 없다. 지지리 공부는 안 하면서 학교는 퍽도 잘 다녔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이래 봬도 개근이다)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자, 그간 놀고먹던 시간들이 쓰나미처럼 덮쳐 왔다. 남들 3년 동안 할 공부를 최단기간에 따라잡아야 하는 입장. 과목은 어찌나 많고 생소하며, 외울 것은 얼마나 많은지….. 허벅지 아래 피멍이 잡히게 공부를 했다(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 본 사람은 안다, 무슨 말인지…..)


요즘 그 시절이 다스 베이더의 포스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데자뷔. 이 모든 상황이 나에게 ‘내가 니 애비다’ 할 것 같은 두려움을 준다.

내가 니 애비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대통령과 우리 동네 국회의원 이름 아는 정도? (내가 10년 넘게 살고 있는 동네의 그간 국회의원을 말하자면, 강용석, 정청래, 손혜원이다. 일부는 준연예인인지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먹고사는 것도 힘들고 귀찮은데 정치 같은 것은 내 돈으로(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으니까) 월급 받는 당신들이 좀 알아서 해 주면 정말 좋지 아니한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몇 년치 공부를 졸지에 몰아서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직권 남용’은 뭐고 ‘권리 행사 방해’는 뭐고 ‘지분 양도’는 뭐며 ‘공무상 기밀 누설’은 뭔가? 여기까지는 그래도 대강 감으로 ‘이러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로 넘어간다 치자.


‘자금 세탁법’은 뭐고, 학교 졸업한 지가 언젠데 왜 ‘국정 교과서’ 같은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백옥주사’는 뭐고 ‘태반주사’는 뭐며 ‘리도카인’은 뭐고 ‘실 리프팅’은 또 뭔가?


그러더니 드디어 뭐? ‘키친 캐비닛’? 이건 뭔가? 청와대 부엌에 있는 장식장인가? ㅜ.ㅜ

대단한 암기력

헌법을 1조부터 외워 재끼는 김제동 씨를 보면서 ‘아, 이제 정말 저 것까지…..’ 하며 가슴은 꽉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금 다시 헌법]이라는 책이 사회 정치 분야 판매 1위의 책인 것을 보면 이런 고구마를 삼킨 사람이 나 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아직 나는 읽을 생각이 없다. 다른 과목부터 좀 하고…)


덕분에 바쁜 연말에도 저녁 8시가 되면 족집게 인강을 듣는 마음으로 <JTBC 뉴스룸>을 무릎 꿇고 시청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손석희 선생님 짱!) 그래도 외울 것은 천지이고 가끔 도표까지 나와서 이전 내용까지 뒤집어 이해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야말로 토가 나올 지경이다. 게다가 주말에는 광화문 광장까지 허적허적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지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험생 건강도 좀 생각해 주셔야지, 들….


하지만 등 돌렸던 과목을 공부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이 따르는지 아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좋은 선생님이 족집게까지 해주시는 데야 ‘입 닫고 공부나 하자’는 마음뿐이다. 운 좋게 피해 나갔다 싶은 일도 결국 나중에 다 셈을 치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인생에서 경험적으로 배운 나로서는 묵묵히 하루치 분량을 해 나갈 뿐이다. 이래서야 어른 말씀 틀린 것이 하나 없다. 플라톤이 말했지 않는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일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라고.

쪽집개 과외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슬프다. 거의 모든 사건들이 파고, 들어가고, 거슬러 가면 과거의 어느 지점과 잇닿아 있다. 내가 하지 않은, 할 수도 없던 그 모든 일들이 이자를 독촉하는 사채업자처럼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고 서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생각한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환경 아래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는, 주어지고 물려진 환경 아래서 만드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이 살아 있는 자의 머리를 악몽과도 같이 짓누르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말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번으로 족하다. 다시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후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피곤하지만 계속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지치게 할 지라도…….

매거진의 이전글결혼은 (퇴근 없는) 사회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