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화번호와 외로움 사이의 거리
우리를 지칭하는 말 ‘인간(人間)’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개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사람(人)이면 족할 것 같지만, 거기에 반드시 사이(間)라는 뜻이 들어가야 완성된다. ‘외로운 늑대’ 같은 것은 되기도 어려울뿐더러 별로 재미도 없다. 007도 틈이 날 때마다 같이 놀 본드 걸을 찾고 ‘제이슨 본’ 조차 어떻게든 동료가 생긴다.
인간에서 방점이 찍혀야 할 곳은 간(間)이다. 대강 사람의 형상이 어떤 것인지 특징이 무엇인지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생각을 하고(‘생각이 있고’ 가 아니다!) 언어를 이용할 줄 알며 도구를 사용한다’ 같은 것들 말이다.(뭐 일부 동물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알며…, 하는 말은 잠시 접어두시기 바란다. 무슨 뜻인지 알면서…..)
하지만 ‘사이’의 문제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다. 나는 ‘손 잡을 정도’의 거리를 원하는 데, 상대방은 ‘마주 보고 앉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가슴이 시리다. 나는‘두 걸음쯤 떨어져 걷는’ 사이라고 생각하는 데, 상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릴 수 있는’ 곳까지 접근하려 들면 몸 근육이 긴장되기 시작한다. 반으로 자른 신표처럼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거리가 일치한다면 문제가 없겠으나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 차이는 두려움이나 허전함으로 채워진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깝게 오려는 상대에게 받는 스트레스나 멀어지려는 누군가에게 느끼는 슬픔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다 잘되고 있는 것이라면, 연말에 나를 붙들고 동료직원 까기에 여념 없는 내 친구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것이고, 썸남에게 연락을 기다리며 발을 구르는 내 후배에게도 햇살이 비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별로 없다.)
이맘때는 전화번호 정리하기에 좋은 시기다.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버려야 하는 것처럼, 묵은 지처럼 저장된, 누른 지 한참 된 번호들을 삭제하기 괜찮은 시간이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어’라는 멘트에 집착적으로 ‘그런데 왜? 무슨 일인데?’를 끈덕지게 묻는 지인이 있다면 엊그제 통화를 했더라도 삭제해주는 편이 좋다. 내가 생각하는 ‘사이’와 그가 생각하는 ‘사이’에 간극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상대적인 박탈감’에 더 민감하다. 남들이 100만 원 받고 나는 50만 원 받는 선택보다, 남들은 1만 원씩 받고 나는 10만 원 받는 선택을 하는 것이 우리다. 곁에 아무도 없어서 외롭기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남이 생각해 주지 않을 때 더 상처받는다.
‘혼밥과 혼술이 성행하는 외로운 시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챙길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만들어 갈 수는 없다. ‘혼자’ 잘 노는 사람이‘함께’도 잘 논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간격과 그가 생각하는 간격이 다르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외롭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나를 ‘심심할 때 불러낼 수 있는 아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 또한 즐거움보다 허전함을 자극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책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전제한다면, 그대는 사랑을 사랑과 교환하고 신뢰를 신뢰와 교환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그대의 모든 관계는 그대의 현실적인 개별적 삶을 그대의 의지의 대상에 따라 특정하게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하자면 그대의 사랑이 사랑으로서 발현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대의 삶을 표현했는데도 이를 통해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전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사랑이요 하나의 불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불행하고 무력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나와는 다른 간격의) 무수한 사람을 떠올리며 설명 못할 슬픔을 느끼기보다는, 현재 내 상황을 제대로 보고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이 빠르다. 망친 시험의 오답노트를 작성했다면, 이제는 다음 시험 범위를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시험 범위는 계속해서 바뀐다. 이제 전화번호부를 한번 들여다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