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완결] 내 딸에게, 내 엄마를 대물려줬다.

딸의 눈빛 속에서 나는 죽은 사람이었다.

by 이지아

딸의 눈빛이 나를 통과해 지나갔다.
마치,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날, 나는 딸의 월급 통장을 훔쳤다.


" 밥 먹자."
내가 내 손으로 상을 차렸다.

따끈한 국을 데우고,
냉장고에서 며칠 전 사둔 계란을 꺼내
말없이 달걀말이를 부쳤다.
멸치볶음은 어제 남은 걸 다시 덥혔고,
주영이가 친구집에서 얻어온 김치는 접시에 올려냈다.


그릇을 꺼내고 수저를 맞췄다.

별것 아닌 상인데, 내겐 오래된 기억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주영 앞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는 것도 어색해서
한쪽 엉덩이만 겨우 걸친 채로 국을 떴다.
배가 고팠는데
목이 막혔다.


"맛있다, 주영아..."


내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떠서 먹었다.
그 모습이 참 고맙고도 무서웠다.


이런 사소한 일이 이렇게 멀리 돌아와야 했다는 게

눈물 날 만큼 아팠다.


주영이는 말없이 밥그릇을 들었다.
숟가락도 조용히 내려놓고,
나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냥 놔둬, 내가 할게..."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그 애는 부엌으로 들어가 있었다.

물소리, 숨소리, 세제 냄새.
그 애는 말없이 그릇을 닦고 있었다.


나는 상에 앉은 채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이 집엔
물을 틀고, 그릇을 닦는 사람이 있다.
고요하게, 아무 말 없이.
그게 나였던 적이 있었나?

... 없었다.
생각해 봐도 그런 기억은 없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삶은 내 몫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나를 대신해 그릇을 닦았고,
나는 그런 자리를 그냥 지나쳤다.
돌아보지 않고.

그런데 지금,
이상하게 속이 들끓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차라리 내 처지가 비참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같은 말은 끝내 삼켜졌다.


'어른인 척했을 뿐이야.'


그 애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살갗이 투명했고, 표정이 말간 아이.
나는 벌써 인생을 질질 끌고 여기까지 와버린 사람이었다.


나는 왜 저 나이 때 저렇게 살지 못했을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쓸모없는 손을 내려다봤다.


그때 주영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 엄마, 잘 먹었어."


그때,
그 애 눈이 스쳤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안엔 뭐가 있었다.
안쓰러움도, 연민도 아닌,
조용한 판단 같은 것.


그 눈빛에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 말이 없는데도, 그 애는 나를 끝낸 것 같았다.


그 애는 열아홉이었지만, 새벽 출근과 밤늦은 귀가를 묵묵히 감당했다


나도 그 애처럼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술도 끊고, 화투방도 끊고, 식당에서 땀 흘리며 일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사나운 말투, 찔끔한 월급. 결국, 퇴근길엔 다시 소주를 들었다.

처음엔 한 병뿐이라며, 나 자신을 속였다. 그렇게 ‘또 한 병’이 되어갔다


# 주영이 월급날


주영이는 새벽 5시에 출근했고, 밤 10시가 다 돼서야 돌아왔다.


나는 그날도 식당에서 하루를 버티다시피 일했다.

사장 눈치 보며 밥을 푸고, 튀김옷을 입은 손가락을 물에 담그며 참았다.


"오늘도 술 마셨어?"


주영이가 물었다. 냄새가 났나 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한 잔만 마셨어. 그냥 입가심."


며칠 후, 주영이가 말했다.

" 엄마, 나 첫 월급 나와. 내일 저녁에 맛있는 것 먹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떴고, 이불에 기대앉아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조용히 외투를 입고 은행으로 향했다.


ATM기 앞에서 손이 떨렸다.
그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자, 눈앞이 핑 돌았다.


조금만 빌리자.

세 번째 기계음이 들릴 때까지 손을 뗄 수 없었다.


손끝이 식었다.

그때, 내 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 월급을 훔치던 그 손도, 이렇게 떨렸을까.


딸아이의 월급통장은 바닥이 났고,

나는 또다시 거짓말을 할 준비를 했다.


" 엄마, 내 월급 어디 갔어? "


주영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했다.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는 뜻 같았다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애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마지못해 바라본 그 애의 눈은,

과거 내 눈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맥이 탁 풀려버린 그 애의 말은, 더 이상 나를 엄마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주영의 눈이 멈췄다.
그 눈 속에서
무언가가 꺼져갔다.
불꽃도 아니고, 눈물도 아닌,
사람 하나가 조용히 사라지는 순간의 빛.


그제야 알았다.
내가 엄마를 이해하게 된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걸.


나는 무너졌다. 이번에도...


나는 기어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내 엄마의 그림자를

내 딸에게 고스란히 드리우고 있었다


그날 이후, 주영이는 침묵했고, 나도 외면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우리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 후로도 빚 독촉에 시달렸다.

그래, 나도 힘들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책상 위, 주영의 학비 통장.

나는, 결국 그것마저 꺼내 들었다


대학교 학자금을 조금씩 모았다는 비상금 통장.


다음 날,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소주를 들이켰다.

차라리 이 모든 걸 잊고 싶었다.


그날 밤, 딸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버린 책상 위를 한참 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더 일찍 집을 나섰다.


그 애의 손에는 작은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다.


" 어디 가니? "


주영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한 문 닫힘이 천둥처럼 울렸다.


나는 알았다.

그 애의 눈빛은 더 이상 나를 닮지 않았다.


그 눈빛은, 나를 버렸다.

그 애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걸 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텅 빈 집. 텅 빈 마음. 그리고 텅 빈 미래.




『도라지꽃』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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