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망쳤고, 그 애는 날 찾았다.

다시 듣고 싶은 이름 '엄마'

by 이지아

그 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엄마'라는 그 말 한마디가,

내 무너진 삶에 다시 물을 부었다.


#낯선 번호

전화벨이 울릴 때, 나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전날 마신 소주가 위에서 올라왔고, 화장실에선 쓴 물만 나왔다.

기운이 빠지기도 전에, 다시 소주잔을 들려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머리가 아픔 탓인지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전화벨 소리가 고막을 찌르듯 울렸다
나는 전화기를 한참을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엄마! "

"...."

"나야. 주영이.”


심장이, 확실히 뛰었다.

어디선가 망가진 벨소리가 계속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고, 다시 열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 주영이니? "


울음은 없었지만, 공기 어딘가가 젖어 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소주잔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물컵을 집어 들었다.

물은 맛이 없었지만, 묘하게 목이 탔다.


그 순간, 나는 망가진 내 삶이 다시 목을 축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애에게서 도망쳤다.

그 눈을 마주치는 순간,

엄마로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그 막막함이 숨통을 조였다.


살림도, 생활도, 밥 한 끼도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벌칙 같았고,
숨을 쉴 구멍이 필요했다.


그 구멍이, 그 애에게서 멀어지는 길 위에 있었을 뿐이다.


내가 사라지면,
그 애가 울긴 하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고,
잘 클 거라고...
그렇게 나 자신을 속였다.

그건 '버린' 게 아니라,
'피한' 거였다.


딸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 애가 날 찾지 않길 바랐다.


#다시 듣고 싶은 이름


" 엄마. "


그 한마디가 오래 걸렸다.
중학생이던 그 애가 떠난 이후,
내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린 건 처음이었다.


누가 날 그렇게 불러준 적이 있던가.


중학생이던 그 애가 떠난 이후,

' 엄마 '라는 말은 내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 이름 하나가,
내 폐부의 들숨을 넣는 숨구멍처럼 느껴졌다.


내가 누군가의 존재 안에
아직 남아 있다는 걸,
그 애의 목소리가 증명해 줬다.


죽은 줄 알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내 안 어딘가에서,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문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딸아이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 엄마 나랑 살면 안 돼? 엄마 같이 살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아서가 아니라
감정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 그래."라는 말이 튀어나올까 봐,

나조차 놀랄 만큼 너무 빨리, 너무 절실하게.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나한테 다시 상처 줄 거라고,

내가 또 망가질 거라고.


그런데도 자꾸 그 애 목소리가 살을 파고들었다.

멀리서 들리는 울음기 섞인 숨소리조차,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이상하게도

내 입술 끝이 먼저 반응했다.


' 내 살 길이 열렸구나! '


그 말이 기뻐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그 말 없이 살아온 탓이었다.

그건 미안함도, 반가움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 오랜만이라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고,

목소리는 내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주영이는 울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 애가 운다는 걸
나는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다시 같이 살아보자


그날 밤,
나는 거실 불을 켰다.

오래된 형광등이 번쩍이며 켜졌고,
나는 그 불빛 아래서 처음으로 창문을 열었다.

검댕 낀 창틀에서 묵은 먼지가 바람에 실려 나갔다.


나는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에 굴러다니던 컵을 씻고, 그 안에 물을 따랐다.


정말 별거 아닌 행동이었는데,
내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 나한테 남은 게 아직 있었네..."


혼자라고 믿었던 이 삶에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그 애 하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애와 다시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들자, 문득 오래전 그 애의 시간이 떠올랐다


#반짝이는 아이

여상 시절, 주영이는 늘 조용히 상장을 책상 위에 올려두곤 했다.

말없이 지나가는 날도 있었고,
내가 술에 취해 있던 날엔
그냥 가방 안에 넣어둔 채 잊어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런 걸 다 기억한다.
종이 냄새, 또박또박 적힌 이름.
그렇게 조용히 자기 삶을 엮어가던 아이였다.


매번 그물에서 뭔가를 건져 올리는 아이.
스스로의 삶을 엮어가는 아이였다.


친구들도 많았다.

재잘재잘 주영이 친구들이 집에 들어닥칠때면,

나도 모르게 여고생이 된 것처럼 그 애들 사이에서 신이 났다.


마치 내가 고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그 아이한테서 나를 보는 기분이었다.


학교 앞 흩날리는 벚꽃 비에

여고친구들과 함께 까무러치게 웃는 모습이,

눈부시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같은 여자애.


세상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야무진 아이.


내가 그런 애를 키웠다고 믿고 싶었다.

그 믿음 하나가, 나를 살게 했다.


그런 애가 다시 나에게 왔다.

내가 운이 좋은 건지, 그 애가 참 어리석은 건지,

그냥 그 순간엔 아무래도 좋았다




창문을 여니 흩날리는 먼지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오래 닫힌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며칠 뒤였다.


" 여기야, 엄마."
주영이가 앞서 걸었다. 그 뒤를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좁은 골목 끝, 낮은 주택 바깥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영이가 먼저 열쇠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그 집엔 식탁도 있었고, 전기밥솥도 있었고,
빨래 냄새와 햇볕 냄새도 있었다.


나는 말없이 가방을 들고,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영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냉장고를 열고, 물을 꺼내 내 앞에 놓았다.


나는 천천히, 그 물을 마셨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아직 버려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 물이 내 식도를 지나가자,

내 안 어딘가 굳어 있던 돌덩이가 녹는 것 같았다.


그 물 한 잔이, 내 인생의 첫 위로였다.


나는 그렇게, 아주 오래전 '나'로 돌아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도라지꽃』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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