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했다

기타 줄도 끊겼지만, 그 사람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by 이지아

전화 한 통이면 충분했다.

기타는 멈췄고, 형들은 무대에 서지 않았다.

나 없는 무대는, 멈춰 있었다.


내 안의 생각이 겹겹이 쌓여 조용히 가라앉고 있을 때쯤,

나는 다시 그에게 연락을 했다.


내가 클럽에 나가지 않는 동안,
형들은 공연을 하지 않았고, 클럽은 멈춰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상진이 형의 말은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 너 없는 무대, 우리도 안 선다."


그 말 한 줄이 목구멍에 걸렸다.

그건 고집이 아니라, 의리였다.


그 말은 나를 향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형 스스로를 향한 말이었으리라...


그날 이후, 상진이 형은 매일 기타를 꺼내면서도 단 한 줄도 치지 않았다고 했다.

기타 줄만 조용히 만지작거리며, 말이 없었다

공연은 없었고. 무대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을 견디는 게 고통이었다.


누구보다 공연장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이, 무대 중앙은 끝내 밟지 않았다.

명순이 없는 조명이 얼마나 차가운지, 조율만 해놓고는 기타를 들지 못한 날이 며칠이었다.

어떤 날은 공연장 뒤편에 서서, 분장실 쪽 문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그 공간 어딘가에 명순의 웃음소리, 튕기던 기타 줄, 흘렸던 음정이 아직도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사장이 무심하게 '다른 여자애 하나 넣자'라고 했을 때,

형은 마치 자기 얼굴을 맞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무대를 지키는 사람의 침묵은, 그때 가장 컸으리라...


그날,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형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

나 없이 서 있는 무대가 얼마나 공허한지,

나보다도 형이 더 오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흘 뒤, 클럽 사장이 집 근처로 찾아왔다.


" 명순아… 미안하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다. "


" 너무 후회돼서 미치겠더라. 다들 너 없으면 공연 안 하겠다고 난리야! "


" 이번만 믿어줘. 약속할게. 진짜로. "


사장이 돌아간 뒤,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전보다 더 깊은 침묵이었다.

잠도 들지 못하고,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나는 방 안에서 기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며칠째 만지지 않은 기타 위엔 먼지가 앉아 있었다.


"돌아가도 괜찮을까?"


머릿속에선 계속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무대는 그날 밤을 떠올리게 했고, 그 기억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기타 줄에 손을 뻗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줄 하나를 튕기자, 익숙한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나는 노래가 좋은 걸까, 무대가 좋은 걸까?"


스스로 던진 질문은 공허한 방 안을 맴돌았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공허하게 방 안을 돌았다.

무대 위에서 느꼈던 따뜻한 조명, 땀이 흐르던 순간, 내 노래에 환호하던 사람들...


그리고 형들...

공연 끝나고 기타를 다시 케이스에 넣던 손길.

"우리 보컬님은 요즘 왜 이렇게 피곤하대~" 하며 장난치던 말투.

그 모든 것이 생각보다 오래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무대 자체가 아니라,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형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없이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그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래, 난 노래가 아니라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는 거야."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조용했다.


"... 나만의 자리는 없어도, 나를 기다리는 자리는 있었지."


그렇게, 나는 다시 무대를 ‘선택’하기로 했다.





며칠 뒤, 나는 다시 무대에 섰다.

마이크를 잡기 전, 형들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아, 우리 보컬님 귀환하셨습니다~"


형들의 눈빛은 말보다 따뜻했다


" 상진이 형, 이제야 좀 웃네~ "


상진이 형은 아무 말 없이 내 기타 줄을 조율해 주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에는 ‘환영한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조명이 켜졌다.
무대 위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한 음, 한 마디.
가슴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리.

이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노래였다.

그 무대는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대 위의 나는, 달라져 있었다.


누군가의 자리도, 술잔도 아닌
나만의 마이크 하나로 빛나는 시간.

돌아온 것이 아니라,
버틸 수 있는 나만의 자리를
다시 ‘선택’ 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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