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보다 도라지가 먼저였던 그 시절.
첫 월급을 받던 날이었습니다.
봉제공장에서 받은 내 이름이 적힌 봉투.
진한 크림색 서류봉투 안에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죠.
그 안에는 돈보다 더 큰 것이 들어 있었어요.
" 나는 이제, 내 손으로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어."
누구의 딸도, 누구의 손도 아닌
'나'로서 세상에 처음 남긴 존재의 무게.
그런데 그 월급봉투는
그 순간에 말도 없이 엄마에 의해 낚아채졌습니다.
" 봉급 받았으면 당장 집에 와야지. 얼마 들었니? "
" 이거밖에 안 나왔니? 너, 중간에 게으름 부렸니? "
말을 꺼낼 수 없었어요.
아니, 하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엄마는 어쩌면 '가난'이란 삶의 현실, 그러니까 '도라지'가 먼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은 듭니다.
그때는 정말, 엄마는 내 마음보다 도라지가 먼저였거든요.
도라지요.
삶의 뿌리 같은 존재.
그 시절의 엄마들에겐 자식보다 앞서는 생계였고,
딸의 말보다 먼저 손에 쥐어야 할 물건이었죠.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세상엔 눈물이 나지 않는 슬픔도 있다는 걸.
그건 뼛속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 나는 나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이라는... 조용한 절망.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의 봉투와 엄마의 질문이 가슴에 못처럼 박힌 채, 오랜 세월을 지냈습니다.
엄마는 왜 그랬을까. 왜 내 기쁨을 기다려주지 않았을까. 왜 내 마음을 먼저 묻지 않았을까.
왜 나는, 그렇게까지 엄마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을까.
이 아픔을 수없이 곱씹었지만,
시간이 흘러 비로소 지금, 이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엄마에게도, 그 시절 살아남기 위한 고단함과 그 무게가
'엄마'라는 이름의 가장 큰 봉투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물론 그날의 상처가 희미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아프고, 가슴 한편에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상처와 함께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상처받은 그때의 나를 글로 꺼내 적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그때의 나를 위해서이자, 지금의 우리 모두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도라지보다 늦게 이해받는 마음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야기를 ' 나의 말 '로 쓸 수 있으니까요.
나를 나로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질문해 봅니다.
왜 내 기쁨을 기다려주지 않았을까.
왜 내 마음을 먼저 들어주지 않았을까.
나는, 왜 그렇게까지 엄마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을까?
첫 월급, 내 첫 성취, 작고 귀한 나의 첫 순간이 누군가에게 무시되거나 빼앗겼던 기억.
엄마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때도 지금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그날의 감정.
아니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때 엄마도 도라지를 놓을 수 없었겠구나...
하고 엄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한 순간.
그리고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채로 오랜 아픔이 남아있는 순간들이 있으신가요?
당신의 첫 월급봉투, 혹은 이해받지 못했던 첫 감정.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면
지금은 꺼내도 괜찮습니다.
이곳은 이야기 위에 국물처럼 마음이 얹히는,
그런 조용한 국숫집이니까요.
당신의 이야기로 이 글이 이어지기를, 조심스레 기다립니다.
이 장면은 『도라지꽃』 시즌1의 실제 에피소드 중 일부입니다.
『도라지꽃』은
누군가의 엄마가 되기 전,
한 여자였던 명순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녀를 이해해 가는 딸의 시선으로도 이어집니다.
『도라지꽃』 시즌1부터,
엄마와 딸의 서툰 사랑과 오해를 함께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