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 -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워터 포 엘리펀트'를 봤다. 이 영화는 1931년 미국 어느 서커스단의 흥망성쇠가 기본 줄거리다. 그리고 그 속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통해 사랑과 삶의 애환을 보여준다. 단순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소박한 드라마지만 주연배우들의 눈부신 매력으로 가득 차 있어 그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다.
로버트 패틴슨은 이 영화에서 수의사를 꿈꾸는 대학생 제이컵으로 나온다. 이 사람은 그다지 연기를 잘하는 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진 배우다. 눈과 눈 사이가 살짝 벌어진 투박하고 거친 얼굴 생김새와 대조적으로 맑고 순수하게 빛나는 눈망울은 상처받은 야생동물을 연상시킨다. 조금 위험해 보이지만, 어쩐지 꼭 안아서 마음을 토닥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서커스 단장의 아내 말레나를 연기한 리스 위더스푼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빛이 난다. 서커스단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고단함과 신산스러움, 다혈질이고 잔인한 성격을 가진 남편과 살아가는 위태로운 모습을 연기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든 채 폭력을 일삼는 남편 밑에 누워있는 그 장면에서조차 그녀에게선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악독한 서커스 단장 어거스트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왈츠의 연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영화 '바스터즈'에서 보여주었던 소름 끼치는 연기력을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떠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나약함과 모든 것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악마 같은 독재자의 모습 사이에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며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에 고도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주연배우들의 탁월한 매력은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맞물려 이 영화를 힘 있고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마치 '드라마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주는 듯,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편집과 물 샐 틈 없는 치밀한 전개가 돋보인다.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서커스 공연 장면을 통해 서커스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는 흥미 있는 볼거리도 제공한다.
이 영화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일대기'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남다른 어린 시절 - 엄청난 시련을 겪고 - 고향을 떠남 - 모험의 시작 - 조력자를 만남 - 여러 가지 관문을 통과 - 괴물을 물리치고 - 미인을 얻고 성공을 쟁취 -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 모든 것을 버리고 - 새로운 모험을 시작 - 겉으로는 초라하거나 비참해 보이는 최후)
제이컵이 기차에 올라탔을 때 그는, 그가 기차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최초의 인물이면서 여러 가지 시련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조언을 해주며 그를 지켜주는 대표적인 조력자 '캐멀'과 제이컵이 처음 만난 시련이자 마지막으로 물리쳐야 했던 괴물인 '블래키'를 동시에 마주친다.
주인공 삼인방의 관계는 '아버지-엄마-아들'의 오이디푸스 삼각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제이컵은 어거스트를 혐오하면서도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면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가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고 화가 나고 때론 살해 충동도 느끼지만 그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거역하지 않는다. 문제 해결 방법을 나름으로 열심히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어거스트가 세운 규율을 위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행동한다.
어거스트는 제이컵이 재수 없고 아니꼽다.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주며 아들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
말레나는 자기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만 제이컵에게 자연스럽게 끌린다. 다가오는 제이컵을 막지는 않지만 행동을 확실하게 제한함으로써 제이컵이 있어야 할 자리를 상기시켜 준다.
제이컵에게 어거스트는 복종하고 따라야 할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자기가 넘어서야만 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원시사회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이방인이 사제를 죽이면 그의 힘을 부여받은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가 바로 다음 왕이 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낡은 세계는 파괴되어 사라져야 한다. 젊고 건강한 수사자에게 왕위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모든 늙은 사자의 운명이다.
많은 말 없이도 화면을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거는 방법을 아는 이 영리한 영화는 단 하나의 장면으로 상황을 확실하게 정리한다. 한 장의 낡은 사진을 바라보는 노인의, 설렘이 깃든 안타까운 표정 하나로 앞으로 전개될 1931년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며,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절망스러운 마음을 어두컴컴한 밤 풍경으로, 인생의 벼랑 끝에서 만난 운명적 만남을 다가오는 기차의 불빛으로 표현한다.
또한 화려한 서커스 쇼 이면에 감추어진, 추악하고 고단한 삶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기차 연기로, 마침내 몰락하게 된 서커스단의 최후는 괴물의 귀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핏방울과 서커스단의 천막이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보여준다.
모든 것을 잃고 서커스단으로 흘러 들어오게 된 제이컵은 너무나 엉망진창으로 잘못되어 있고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서커스 단원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용기를 준다. 무더운 여름 먼지에 뒤덮여 건조해지고 지친 코끼리 로지에게 시원한 물줄기를 뿌려준 것처럼 제이컵이 말레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기에 그녀는 어둠에 가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자신의 또 다른 미래를 향해 뛰어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용기 있는 선택으로 남은 삶을 행복하게 알콩달콩 잘살게 된다.
누구에게나 한 번의 기회는 찾아온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사방이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저 멀리서 반짝이는 작은 불빛은 마음속에서 꺼져가는 용기를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해주는 불씨가 되어준다. 그것은 간절히 원할 때만 찾아오는 구원의 손길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다가온 한 줄기 불빛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이면서 동시에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시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