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마음이 답답할 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꺼내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스펀지 하우스에서 이 영화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문제는 그 기억만 있다는 것.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꺼내보는 김에 봐야 할 일이 생겼던 <러스트 앤 본>도 함께 봤고, 자연스럽게 A의 글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A와의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A는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A도 그러고 있을까. 잊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A와 함께 동행해야 할 일이 생겼다. A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라 단 둘이 한 시간가량을 함께 해야 했는데, '그 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끝낸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예전에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설명하거나 사과하거나 변명하는 일에 집착했는데 요즘엔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란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래, 그런 것들을 다 설명할 수는 없어. 내가 타인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는 없어. 우리는 차 안에서 '그 일'을 제외한 다른 일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잘 보이는 것은 츠네오의 감정이다. 영화는 츠네오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직접' 말하고 표현하지 않는다. 영화 전체에 걸쳐 알 수 있는 무언가로 남겨 놓는데, 나는 그걸 조제에 대한 동정(또는 호기심) 정도로 보고 있다. "너도 다리를 잘라"라고 조제가 카나에에게 하는 말에서 그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츠네오의 감정은 영화 전체에 걸쳐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럼 그걸 배경으로 무엇이 전경화 되느냐, 그건 바로 조제의 '움직임'이다. 조제는 이 관계의 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제는 자신의 미래, 두 사람 관계의 끝을 알고 관계 맺음을 시작한 것이다. 카메라는, 역시 조제의 그런 마음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사강의 소설을 통해 복선처럼 영화 초반에 그게 등장한다. 그러니, 이 영화는 두 사람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조제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할머니가 끌어주는 휠체어를 탄 수동적인 움직임에서 홀로 움직이는 전동 휠체어를 타는 움직임까지의 여정이 바로 이 영화의 줄기인 것이다.
마지막을 알고도 현재에 뛰어드는 것,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나는 이 영화를 요약하는 단어로 보인다.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제는 관계를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상처받고 혼자 남을 거란 미래를 알면서 말이다. 끝을 알고 시작하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이 말은 결정론에 관한 것이 아니다. 끝을 향하는 일은 언제나 개선의 여지가 있으니까. 그 움직임은 오히려 결정론이 가리키는 화살표의 반대를 향한다. 조제는, 관계의 운명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으며 그 결론으로 향하게 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지만 츠네오와 함께 할 여정에서 예측불가능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조제에게 중요했다. 혼자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츠네오와 함께 했고 그 결과 조제는 홀로 움직이게 되니까. 그 과정에서 조제가 두려워했던 호랑이도, 보고 싶어 했던 물고기도 그저 그런 거라는 걸 깨닫는다.
언젠가 A는 다른 영화로 결말을 알고도 전진하는 인물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미래를 보고 온 인물들, 단호와 결의와 수용은 운명에 대한 체념과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시 꺼내본 이 영화가 달리 보였던 이유는 이제 나도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그 끝이 어느 정도 보이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느낌은 항상 비켜가는 일이 없다. 이건 예지에 관한 것도 아니고 내가 일부러 그 방향으로 일을 이끌어서 그런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된다. 그냥 그렇게 되기 전에 불안함이 엄습해 오고. 모두가 그런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섣불리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미래가 보이는 순간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차라리 그게 낫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조제는 용기가 있었지만 아직 나는 그러지 못한 것 같다. 너와 나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