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으로 파리에 다녀왔다. 나에게 계획을 세우라고 할 때부터 영화로드를 떠올렸다. 예전에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던 카푸신가의 표지판과 석판, 몽마르트의 트뤼포, 시네마네크 등을 기획했다. 물론 여기에 아무도 동참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함께 한 일행은 관심도 없을 거라 생각이 들어 그날을 자유시간으로 열어 놓았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나 혼자 돌아다닐 의도가 숨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따로 일정을 다 잡아 주었는데, A만이 의견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모두들 자연스럽게 A가 나와 함께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나는 크게 상관이 없었고, A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고. 게다가 A도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네마테크에 함께 가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먼저 카푸신가에 있는 초기 영화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곳은 덩그러니 표지판 하나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고. 나는 읽지도 못하는 표지판의 프랑스어를 쳐다보며 아는 단어를 찾아내며 알은체를 했다. 이미 구글 스트리트뷰로 몇 번이나 확인했서 봤던 거고 어느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을 통해 문구까지 확인했던 건데, 실물로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가 최초로 상영되었고 수업시간마다 언급했던 그곳. 지금은 백화점의 한 구석이 되어버린 곳. 그런 내 모습이 신기했는지 A는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사진을 잘 찍지 않았던 평소의 모습과 다른 나의 적극적인 모습에 A는 실소를 터트렸다.
우리는 마들렌(Madeleine) 역으로 가서 베르시(Bercy)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은 깔끔했다. 3년 전에 탔던 것보다 개량된 느낌이었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빨랐다. 20분 뒤에 우리는 베르시 역에 도착했다. 눈에 보이는 출구로 나와 기억을 더듬어 공원 쪽으로 향했다. 구글 지도를 켜고 갔는데, 그것보다 기억이 더 우선했다. 나오자마자 그 공연장이 보였고 여전히 똑같은 상징물과 분위기가 흘렀다. 길을 따라 걸으니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독특한 외관이 서서히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3년 만에 다시 오게 되었다. 이 앞에 예매해 놓은 표를 찾기 위해 스마트폰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A가 603인지, 604인지를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도 잠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곧 604라고 대답을 해 주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던 건 중간에 한 번 번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A는 604에서 시작해 영화의 출발점에 이르렀다고, 너무 신기하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신기하다는,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표는 찾지 못했다. 예매번호를 불러주고 그걸 티켓으로 바꿔왔다. 우리는 좀 그 안을 돌아다니다가 박물관으로 향했다. 향하는 길에 동양인이 우리 말고 한 명 더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일본에서 온 것으로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본 그 사람의 아이폰 배경이 일본어로 되어 있었고. 우리는 서로 눈인사를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은 작았다. 모두 영화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 나왔던 순간들이었다. <휴고> 소품과 멜리에서 에피소드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 A는 '멜리에스'라는 단어가 입에 잘 붙지 않는지 옆에서 계속 연습을 했다. 그리고 체험하게 만들어 놓은 주프락시스코프와 영사기를 돌리며 재미있어했다. 박물관은 금방 둘러볼 수 있었다. 기프트샵에서 책과 블루레이를 한참 둘러보다가 문득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한 생각이 스쳤다. 그 시간과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이 되었을까. 그러다 문득 A가 의견을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이미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알아챈 건 한참 늦은 뒤였다. 내가 듣고 무시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건 이미 확인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중요한 것은 왜 항상 늦게 오는 걸까. 마침 우리는 센 강의 다리 중에서 가장 늦게, 달리 말해 가장 최근에 지어진 다리를 걷고 있었다. 이 다리는 프랑스의 한 철학자의 이름을 따서 나무를 이용해 곡선의 형태로 지은 보행자 전용 다리였다. 베르시 공원과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잇는 다리였는데, 내가 가야 할 길에 도서관이 나오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A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걷는 걸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