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수업의 풍경

by 리다

용산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사분의 일쯤 가자 택지개발지구를 지나는지 긴 공사장 옆길인데, 아직 내비게이션에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새 현장인 듯 계속해서 없는 길로 표시가 되었다. 휴대폰 창은 없는 길로 직진만 하고 있는 나를 허공에 표시하며 새로고침을 거듭했다.


나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급기야 삼 킬로미터 앞에서 유턴을 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수업 시작 전 십오 분을 가리켰던 창은 이제 일분 전 도착으로 표시된다. 서울로 완전히 진입하기 전까지는 그런 새로고침의 연속이었고 잠깐 무슨 짓인가 망연했지만 일단은 내비게이션을 믿고 가기로 했다.

역은 오 년 전보다 훨씬 덩치가 커진 것 같다. 들어가기 전부터 달이며 해며 별이며 여러 개의 주차장 이름으로 헷갈리게 하더니, 진입로도 무척이나 길어서 건물에 들어서기도 전에 그 위용에 주눅 들게 한다. 주차를 하고, 수업장소를 찾아 또 헤매기 시작한다. 결국 수업 장소에 도착한 것은 시작 시간의 이십 분 여를 넘긴 지점이었다.

허겁지겁 빈자리를 찾아 앉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게 수업을 소개해주신 분이 작가 소개를 찾아 읽어주고 계셨다. 작가의 추정 나이, 글을 쓰게 된 계기, 배경 등등, 그러니까 작가의 프로필이라 할만한 것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책 읽은 소감을 말한다. 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앉은 두 분의 설전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선생님이셨다. 화자의 주변인물이 던진 결정적인 말에 대해 그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다.. 독자는 여기서 혼돈이 생긴다.. 는 말씀이었는데, 내 왼쪽 분은 주인공이 트랙을 돌다 만나는 또 다른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다.. 내 오른쪽 분은 아니다, 거기에 그것을 알 수 있는 연결고리가 어디 있느냐, 그건 모른다. 상관이 없는 서로 다른 타자의 이야기다, 로 치열했다. 나는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 얘가 왜 이러지? 요는, 나도 남자가 타인의 입을 빌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읽었기에 그 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 참전 전의 병사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던 거다. 나는 늘 평화주의 잔데, 어디서도 내 의견이나 의향은 숨기는 편인데, 여기서만큼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가슴이 쿵쾅댔다.

이게 무슨 일일까?


왼쪽 분이 단서가 없다는 이유로 설전에서 밀려, 그냥 저는 그렇게 읽었어요, 로 패색이 짙어지는 듯해서 손을 번쩍 들었다. 직접적 단서는 없지만 독자가 그렇게 읽는다면 그로써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기도 하지 않을까. 나는 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늘 조용조용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이 얼굴을 찌푸리며 "매개항은 그런 게 아니에요!" 처음으로 내 무지성 발언에 불쾌감을 드러내셨기에 멈칫했다.

그랬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 교실에서 가장 큰 대척점을 그리자면 '선생님과 나'일 것이다. 수십 년을 쓰고, 소설 작법을 공부하며 저서까지 집필한 선생님과 나. 소설을 쓰기는커녕, 읽지도 않으며 당당히 머릿속에 '나는 공부가 싫어요. 나 자신이 일자무식인 게 나는 너무 좋아요.'라는 문장을 품고 사는 나. 선생님은 저 자리를 수십 년 지켜오셨을 것이다. 나는 말 그대로 굴러온 돌, 우연히 누군가의 발에 채여서 여기까지 또로록 굴러왔다. 더 멀리 갈 수도 있고 오다가 멈출 수도 있었지만 여기에서 멈춰 섰다. 그건 나의 의지였다. 지금 나는 내 의지가 여기에 멈춰서 얼마나 오래갈 것인지 시험 중이다.

일자무식인 나는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매개항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나 자신이 작가가 아니기에 그것은 알 수 없다고 하셨다. 예를 들 수는 없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었는데, 더 이상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그다음은 키우던 개의 죽음 이후 이야기였는데, 현대의 반려견 풍토에 관한 또 다른 설전으로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소설 이야기가 '개' 이야기로 옮겨가버려서 사람보다 개에 더 애정을 쏟는 풍토를 비판하는 관점과 그럴 수밖에 없는 옹호 관점이 또 대립해서 오른쪽 분은 자신의 오른쪽 사람의 왼쪽이 되어 내가 아닌 또 다른 한 분을 가운데에 끼고 설전을 이어가기 시작하셨다.

수업이 마치자, 선생님이 물으셨다. 다음 합평은 누구냐고, 총무님이 서둘러 말씀하셨다. 아, 다음 합평은 새로 오신 분, 하며 내 쪽을 손바닥으로 가리키시는데 거리만 가깝다면 그 손을 잡고 황급히 내려드리고 싶었다. 아니요, 어제 총무님께서 전화 주셔서 대답만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안 될 것 같습니다. 그건 글이 아니라, 일기나 리포트에 가깝습니다.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쓴 글이 아니에요. 이런 합평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왼쪽 분이 말씀하셨다. 내세요. 어차피 글 읽어줄 사람도 없잖아요. 나는 격려를 듣고 오히려 마음이 다급해졌다. 선생님이 눈치채고 말씀하셨다.


첫 글은 칭찬만 합니다.


사자도 아기는 세게 물지 않는다. 뭐, 그런 뜻일까. 총무님이 제출 안 하시면 안 되세요, 우리도 다 일정이 짜여 있기 때문에 파일을 안 올려주시면 펑크가 나게 돼요. 그저 압박을 가장한 온건한 권유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나는 좀 더 강하게 안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낼 수 있었다. 선생님이 쐐기를 박듯 말씀하셨다.


내실 겁니다.


어떻게 아셨을까. 무려 오 년 전에 마구 써 내려간 글이다. 창피하고 부끄럽지만 내가 쓴 글이고, 그 글에 드러난 것도 내 모습이다(오 년 전이기는 하지만). 내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작업은 단편소설 쓰기나,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고, 읽히고, 합평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어도 괜찮다는 것, 부끄럽지만 나를 드러내는 용기를 내는 일이다.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두들겨 맞을 것을 각오하고, '나'를 당당히 드러내고 온전히 포용할 수 있을까? 부끄럽다고 감추지 않고, 어딘가 몰래 유기하지 않고, 이런 '나'도 괜찮다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까? 엊그제 본 누군가처럼.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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