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몰라병이 만든 최고의 습관
나는 가까운 거리에 나가더라도 항상 가방을 챙기는 버릇이 있다. 주머니에 무언가 들어있는 게 싫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끔찍한 “혹시몰라병”에 걸렸기 때문.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핸드크림이나 보조배터리, 심지어는 헤어스프레이와 분무기도 챙긴 적이 있다. ‘이걸 들고 다녀서 도대체 어디에 쓸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실제로 이 녀석들이 가방에서 나온 적은 극히 드물다) 혹시 모른다. 길을 걷다가 축 처진 꽃잎을 보고 분무기를 꺼낼 수도 있지 않나.
끔찍한 가방의 무게에 못 이겨 집에 돌아오면 결국 하나둘씩 애물단지들을 가방에서 꺼낸다. 그러나 아무리 가방이 무거워도 포기하지 못하는 세 가지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읽을 책과 조그마한 노트, 그리고 볼펜과 포스트잇이 담긴 필통이다. 가방이 다 젖을 정도로 세차게 비가 오는 날에도, 잠깐 밖에 나갔을 뿐인데 등에 땀이 뻘뻘 나는 날에도 이 세 가지 물건들은 무조건 챙겨서 밖에 나간다. 신념이라면 신념. 고집이라면 고집이다.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이 아니면 하루에 한 권의 책을 읽기로 스스로 다짐했기 때문에 책을 게을리 읽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 등 조금이라도 책을 읽을 시간이 생기면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책을 펴고 글을 읽는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필통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책 귀퉁이에 붙인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뒤에 포스트잇이 붙여진 페이지를 찾아 노트에 가볍게 필사한다. 좋은 문장들을 곱씹으며 필사한 곳 아래에 나의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그 문장은 곧 나의 글감이 된다.
어찌 보면 정말로 비효율적인 작업이지만 나에겐 오히려 굉장히 가성비있는 활동이다. 왜냐하면 나는 금붕어도 놀랄 정도로 기억력이 안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제 있었던 일은 무슨 몇 시간 전에 했던 일도 까먹기 일쑤며, 사람 이름도 잘 외우지 못해 난처했던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다. 중요한 약속도 금방 까먹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 번은 사죄를 드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쁜 감정도 금방 잊어버리는 게 장점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내 기억력 때문에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내 몸이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덕분에 생긴 좋은 습관이 있으니 그건 바로 메모와 일기 쓰기다.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서 갑자기 무언가 번뜩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의 깊이나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것들은 내 머릿속에서 금방 휘발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나는 잊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그 순간에 빠르게 노트를 꺼낸다. 그리곤 지금 떠오르는 문장이나 장면에 대한 표현을 혼잣말로 되뇌며 끄적인다. 금붕어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평생 동안 오백 권이 넘는 책을 썼다고 알려진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히 메모해라, 쉬지 말고 적어라.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 기록은 생각의 실마리다. 기록이 있어야 기억이 복원된다. 습관처럼 적고 본능으로 기록하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中)
이는 생각이 떠오르면 쉬지 말고 적으라는 수사차록법(隨思箚錄法)의 내용이다. 기록을 통해 생각을 붙들고 계속하여 깨달음을 복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다작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일기장을 펼치고 그 옆에 오늘의 메모가 담긴 노트를 펼 때면 감정이 고양된다. 평범했던 일상에서 반짝이는 사건들을 찾아내고, 오늘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되새김질한다. 일기장에는 나의 순수한 감정이, 노트에는 오늘의 시선이 담겨있다. 그렇게 5년 동안 쌓여있는 먼지와 함께 나의 20대는 차곡차곡 간직된다.
오랫동안 기억할 수 없으면 오랫동안 기록이라도 해야지. 오직 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나의 메모는 혁신적인 기억력 촉진제가 개발되지 않는 이상 아마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