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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Apr 25. 2023

진짜 답없는 철학

[철학]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렝 드 보통

노답의 매력


철학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면 다른 책을 읽을 때와 달리 묘한 위화감이 든다. 보통 책을 읽는다고 하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함이나, 감정을 풍부하게 하기 위함이 일반적인데 철학책은 그 느낌이 확연하게 다르다. 뭐랄까 오직 생각을 하기 위한 책읽기라고나 할까. 책을 읽는 목적 자체가 사색에 집중되다 보니 책을 읽는 시간보다 떠오르는 생각을 노트에 적는 시간이 훨씬 많다. 그래서 그런지 철학책을 읽고 난 뒤에는 항상 오른쪽 손가락에 즐거운 뻐근함이 남는다.


철학... 이라고 하면 보통 뜬구름 잡는 소리라거나 쓸데없는 학문이라고들 많이 말한다. 뭐,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서 누군가는 직관적인 문제에 가치를 두고, 누군가는 추상적인 문제에서 현실을 바라보려 할 테니. 내가 철학에 관심을 가지며 느낀 바로는 오히려 철학을 공부하면 현생을 더욱 효율적으로 살 수 있는데 그런 건 둘째 치더라도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데에는 노답의 매력 때문이다. 


철학은 정답이 없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수학, 과학, 법학 등의 전문적인 학문과 달리 철학에는 따로 정해진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자신만의 똥고집이 있다면 누구나 철학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철학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인간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개인마다 그 성격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이를 정의할 수 없다. 때문에 철학은 중의적으로 답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렝 드 보통


답 없다는 그 느낌이 색다르기도 하고 묘한 매력을 풍기기 때문에 나는 서점에 가면 꼭 1~2권 정도는 철학서를 구매한다. 오늘 읽은 책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역시 중고서점의 구석에서 발견했는데 제목이 참 독특하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오마주 한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은 독자에게 '이루지 못한 사랑에 좌절한 베르테르가 철학을 통해 기쁨을 되찾았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최근 읽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무척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작가 역시 마음에 들었다. 모래사막에서 반짝이는 보석알을 발견해 낸 것 같은 기쁨이란 이런 것일까. 이 중독성 때문에 내가 서점을 끊지 못한다.


책에는 총 6명의 철학자가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와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등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인물들이 목차를 채운다. 책에 등장하는 6가지의 인물을 모두 전달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글이 하염없이 길어질 것이 뻔하고, 나조차도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를 것 같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니체"에 대해서만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째도 행복, 둘째도 행복. 오직 행복을 찾아서 - 에피쿠로스


"만약 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락을 빼앗고, 또 아름다운 형태를 보며 일어나는 달콤한 감정들을 빼앗아 버린다면 나는 행복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대표적인 쾌락주의자다. 철학과 쾌락. 뭔가 이 둘의 단어가 어울리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당신은 아직도 철학에 대한 선입견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철학은 곧 인간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쾌락은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만큼 필수적인 요소다. 조금이라도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인간은 곧바로 망가질 것이다. 언어가 주는  왠지 모를 찝찝함 때문에 그렇지 쾌락 없인 행복도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잠깐 개인적으로 생각한 쾌락과 행복의 차이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 쾌락은 감정의 한 종류이자, 수단이자, 도구로서 우리에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쾌락은 꽤나 직관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할 때 쾌락을 느끼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행복은 한층 더 복잡하고 상위에 존재하는 감정으로, 쾌락보다는 조금 더 불명확한 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쾌락과 달리 다양한 감정으로부터 발현되는데 때로는 부정적인 상황이나 감정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벤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하자면 행복이라는 원 안에 쾌락이 포함되어 있는 느낌일까. 하여간 행복이라는 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범위가 방대하다. 우리가 행복을 표현할 때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류는 영원히 무의미하고 무익한 고통의 희생자가 된다. 물건의 구입이나 순수한 쾌락의 증대에 어떤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탓에, 쓸데없는 불안으로 안달복달하면서…….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행복에 필수적인 것으로 세 가지를 뽑았다. "우정" "자유" "사색"이 바로 그것인데, 딱 봐도 세 단어가 모두 직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석해보자면 우정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연대, 혹은 공감을 표현한 것일 테고, 자유는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다. 사색은 철학자라면 다들 환호할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따위에 대한 생각이지 않을까. 확실한 건 이 세 가지 단어는 그가 멀리하고자 한 "돈"에 비해 굉장히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돈을 멀리하고자 했다. 행복의 판단 기준이 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쾌락을 추구한 것이다.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물론 쉽지야 않겠다.(그러니까 철학인 거겠지) 돈과 값비싼 물건은 인간에게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다가와 직관적인 쾌락을 선사하는데, 행복은 그에 비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좋은 집과 차, 명성과 권력 등 눈에 보이는 쾌락은 언젠가 시들기 마련이고 그러한 쾌락에 자극된다면 더 큰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견해다. 기원전에도 이랬는데 지금처럼 돈으로 모든 것이 정해지는 자본주의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오직 돈으로 살 수 있는 쾌락만이 행복이라고 느끼는 이 시대에서 "행복"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통 없이는 행복도 없다 - 니체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대전제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행복을 규정한다. 누군가는 돈, 누군가는 명예, 누군가는 에피쿠로스가 말한 우정이나 자유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행복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행복을 최대로 느끼길 원한다. 그러나 대가 없는 행복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 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대는 가능하다면 고통을 물리치기를 원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고통을 증폭시키고 그전보다 더 악화시키는 것 같다." - 니체


니체는 고통과 행복은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일상의 경험 상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찍 일어나면 에너지가 넘치는 자칭 '아침형 인간'인데 역설적이게도 늦잠이 굉장히 많다. 알람이 울려도 눈이 번뜩 떠지지 않아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것은 기본이고 '일어나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뜬 채 졸곤 한다. 그렇게 평소보다 늦잠을 잔 날에는 일찍 일어나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이것은 곧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니체가 말한대로 늦잠을 자지 못한 것보다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는 그 생각에 더욱 고통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하고 있다. 지긋지긋한 공부와 노동 등 빠르게 고통에서 해방된 뒤에 그 결과인 행복을 맛보고 싶어 한다.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이고 행복은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고통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건강한 몸을 만들었다는 성취감을 얻을 수 없다. 고통이라는 뒷면을 마주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의 본질을 맛볼 수 없다는 게 니체의 철학이다.



"훌륭하고 존경받는 것들은 분명히 정반대인 사악한 것들과 교묘하게 얽혀 있고, 사슬로 꿰어져 있다. 사랑과 미움, 감사와 보복, 선한 본성과 분노는 서로 뒤얽혀 있다" - 니체

어쩌겠는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아무리 애써도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바꾸면 되는 일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니체는 '행복이란 고통을 치르지 않고는 절대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한다고 해서 모두가 유익한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이를 바꿔 말하면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니체는 우리를 아프게 하는 고통 역시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고통과 행복 뿐 아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정의한 모든 반대되는 것들은 역설적이게도 함께 섞여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언어로 규정했기 때문에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한 현상을 어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미움 없는 사랑이 존재하는가? 온 세상이 감사로만 이루어져 있나? 선한 본성 안에 분노만이 포함되지 않을 수 있나?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이 직관적이고, 또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나눈 것이지 한 현상에 대한 절대적인 선악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인간이 규정한 언어이자 관습일 뿐이다.



시상식이 없는 경기


그러니 다시 말해서 철학에 진짜 정답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다. 두 철학자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론은 확연하게 다른 것처럼 말이다. 아마 책에 등장하는 6명의 철학가로부터 그들의 행복을 꼽았다면 더욱 다양한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그전에 내 머리가 견디지 못했겠지만) 철학의 레이스에선 그 누구도 1등일 수 없고, 그 누구도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상대방의 의견을 부정하는 순간 나의 철학 역시 부정당할 수 있다는 게 이 철학 경기장의 룰이다.


행복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만 논했는데 이렇게 긴 글이 나왔다. 글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 몰랐는데 역시 좋아하는 분야라 그런지 철학이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쓰게 된다. 아마 이 역시 답 없는 철학의 매력 덕분일테다.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저마다의 정답을 제시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그것을 정교하게 깎아내는 작업. 이 작업은 결코 끝이 나지 않겠지만 중간에 멈추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스스로 생각하고 삶을 그려내야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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