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석
아침 7시. 가족들이 일어나 출근준비를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바삐 움직이며 내는 달그락 소리에 나는 여유롭게 눈을 뜬다. 기지개를 쭉 펴고 스트레칭을 하며 부모님을 배웅하고 대충 얼굴을 씻은 채 천천히 집을 나선다. 출근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로 가득 찬 버스정류장을 지나 고요한 시립 도서관에 도착한다. 남들 다 회사로 출근할 때 나는 도서관에 도착해 혼자 검표 없는 출근 도장을 찍는다.
따로 시험공부를 하거나 자격증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남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뭐 그런 것도 아니다. 햇살이 잘 통과하는 유리창 앞 책상에 자리를 잡고 집에서 가져온 책과 노트를 펼친다. 두세 시간 정도 책을 읽고 대충 점심을 때운 뒤 글을 쓴다. 맞다. 난 '남들'이 말하는 백수다. 친구들 다 학교 다니고 취업을 준비할 때 난 백수가 되기로 했다.
평생 동안 사회적 알람에게 쫓겨 다닌 나에게 어찌보면 인생 첫 일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주위에서는 축하의 말보단 걱정과 핀잔의 목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글 같은 거 쓰지 말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좀 살지.’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살아야 하지 않겠니?’ ‘남들 다 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야’ 도대체 남들 누구요. 누가 그렇게 평범하면서 잘나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겁니까. 남들이 말하는 남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하다. 실존한다면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하게.
극단적 집단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개인주의라는 말은 참 불량스럽게 들린다. 모든 기준이 ‘남들’에게 맞춰진 사회에서 스스로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도 참 어렵다. 게다가 그 기준이 사회의 기준과 동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비상사태다. 스스로 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비상벨을 울린다. 이러한 한국사회에서 남들에게 개인주의자를 선언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아무래도 한국인들에겐 미친 짓이라는 생각밖에 안들 것 같은데 말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긴다. (p.22)
리바이어던이 누군지 바다괴물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모르겠지만 남들로부터 나온 행복의 잣대가 개인을 망친다는 뜻은 격하게 이해했다. 집 근처 학원가에 돌아다니는 생기 없는 표정만 보더라도, 원치 않는 자격증 공부를 하며 담배를 물고 있는 친구를 보더라도, 남들 다하는 평범한 결혼식을 위해 무리했던 지인을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너가 원한 행복이니?”라고 묻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과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내 꼴을 보고도 그렇게 말하냐?”라고.
행복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되돌아보니 그 행복은 나를 위한 행복이 아니었다. 때로는 부모님의 행복이었으며, 지인을 위한 행복이었고, 시스템에게 바치는 행복이었다. 남들이 행복한 것이라고 말하길래 나는 그게 행복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거 행복 맞나? 책을 읽다 보니 지금까지 행복이라는 감정을 잘못 이해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스스로 행복감을 느낀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맞다고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너 정도면 행복한 거야’라는 말에 ‘으응.. 고마워.’라고 얼버무렸겠지. 나 정말 행복한가?
책중 <마왕 혹은 개인주의자의 죽음> 파트에서 작가가 신해철의 노래 <나에게 쓰는 편지>의 가사를 인용했길래 도서관에서 이어폰을 꽂고 들어봤다.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촌스러운 멜로디였지만 가사의 내용은 오늘날의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그런 것들에 행복이 있기야 하겠지만 확실히 그런 것들은 남들에게 학습된 행복이겠지. 행복은 정의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왜 행복의 요소들은 남들이 다 정해놓은 걸까. 억울할 따름이다.
혼잣말처럼 들리는 다음 가사에서는 살짝 눈물을 흘릴 뻔하기도 했다.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어느 백수가 한적한 점심시간(물론 나만 그렇겠지만) 도서관에 앉아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을 때 생기는 이 고독함, 불안감, 외로움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개인주의자 선언은 참 힘든 일이었구나.
남들이 걷는 길이 아닌 만큼 남들의 행복을 좇지 않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에서 행복을 발견한 이상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선 신해철의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시간에 출근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을 바라보니 ‘남 부럽지 않게 사는 것’보다 ‘남 부러워하지 않고 사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러워도 별 수 있나. 나 역시 개인주의자 선언을 한 이상 남들처럼 살긴 이미 글렀다. 그러니까 남들처럼 많은 것 안 바랄 테니 작은 응원이라도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