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세상에는 위험한 책이 존재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간접적 폭력으로 인한 인간의 파괴를 알려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은 고독한 사랑의 끔찍한 결과를 알려준 최진영의 <구의증명>이 그랬다. 책을 읽고 난 뒤 한동안은 알 수 없는 후유증에 빠졌고,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읽을 순 없었던, 그럼에도 계속해서 시도했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역시 내게 위험한 책 중 하나였다. 물렁한 마음으로 읽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책이라 마지막 페이지를 마주하길 계속해서 미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주한 결말에 두려움을 참아내며 이 책의 위험성을 알리려 한다.
내가 이 책을 위험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주인공과 작가가 소름 끼치도록 불쾌하게 인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극단적 허무주의에 치우친 작품이라는 선입견을 장착한 채 아무리 비판적인 시선으로 책을 보려해도 소설 속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부정할 순 없었고, 그러한 사실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미디어에는 자극적인 요소만 나올 뿐 세상은 넓고 착한 사람은 많다고 스스로를 위로함에도, 소설의 결말에 다다를수록 어쩌면 내가 인간의 추악한 본질을 애써 외면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치 내가 주변사람들의 좋은 모습만을 보려고 애쓰는 것 처럼.
책은 총 세 편의 수기로 나누어졌으며, 출간 당시에는 일본의 한 문학잡지에 투고되었다고 한다. 작품을 투고한 뒤 그는 자신의 애인과 함께 자살했기 때문에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마지막 작품이다. 평론에 따르면 인간실격 외에 그의 다른 작품 역시 우울하고 비관적인 형태였지만, 인간실격만큼 적나라하게 감정을 표현한 작품은 없었다고 한다. 이전의 작품이 타인을 위한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은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작품이었으며 마약에 중독되어 정신병동에 들어가고, 수차례 자살을 기도한 것이 주인공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그의 회고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저의 공포는 예전 못지않게 격렬하게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연기는 아주 자연스럽고 활달해져서 교실에서는 늘 반 아이들을 웃겼고... p.34
소설은 주인공 "요조"에 대한 서문과 그의 수기로 시작된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다른 인간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거나, 자신이 다른 평범한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 그는 타인 앞에서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겉으로는 해맑은 "광대"를 연기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혐오와 동시에 공포심이 깔려있다. 특히, 그의 내면을 살펴보면 여성을 더욱 두려워하고 냉소적인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여성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작가의 생애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작품 속 주인공은 지나칠정도로 인간을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또 판별한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소속한 어느 정당의 고위직 관료가 마을에서 연설할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환영하고 존경심이 가득한 채 바라봤지만, 연설이 끝난 뒤 그들 모두가 연설이 지루했다고 뒷담화를 하는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느낀다. 인간은 애초에 끔찍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모든 감정이 결여된 그의 인간분석은 대부분 옳았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내면을 꿰뚫수 있었을 뿐, 그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인생"은 꿰뚫어 볼 수 없었고,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인간에 대한 혐오감만으로 자신을 채워나간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저는 역시 인간이라는 것이 여전히 무서워서 가게 손님들을 만나려면 술을 한 컵 벌컥 마시고 나서가 아니면 안 되었습니다.
무서운 것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었습니다. p.129
소설의 중반부로 넘어가며 주인공은 점차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술과 담배, 여자 등 즉각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곤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고, 집안의 물건들을 전당포에 넘겨버리거나 자신을 도와준 인간에게 조금의 감사함도 느끼지 못하는 등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부를 수 없을 만큼 인간성을 상실한다. 인간의 본능, 도덕, 가치 등은 자신에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하려는 듯 주인공은 허무주의에 빠져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고, 소설의 후반부에선 자신이 인간으로서 실격당한 존재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는 인간으로서 실격된 존재였을까. 인간실격이라는 책의 제목이 작가와 주인공을 지칭한 것이라면 나는 그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름을 깨달았기 때문에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하지만, 주인공은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게 공포를 느끼는 존재고 미약하게나마 사랑을 경험한 존재다. 외롭고 괴로운 감정이 몰려올 때마다 현실에서 도피하며 "나는 원래 인간이 아니니까"라고 자신을 정당화했을 뿐 그는 그저 단단하지 못했던 인간 중 하나였다. 인간 본연의 추악한 모습을 이토록 진실되게 꿰뚫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을 잘 이해하는 인간다운 존재였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p.174
인간은 결핍한 존재고, 또 불완전한 존재다. 불안정함에 불안을 느끼고, 고독함을 견디지 못해 우울감을 느끼고, 실패에 좌절감을 느끼며 완전하지 못해 괴롭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완벽한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존재가 진정한 "인간실격"이 아닐까. 인간이길 원한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인간합격의 길이라면 우리는 결핍을 인정하고 인간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망상이 취미인 내가 언젠가 했던 상상이다. 어딜 가든 맞는 답만 내놓고, 누구에게나 환영받고, 술술 일이 잘 풀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인생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이러한 망상은 결코 희극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이 금방 지루해는 것은 둘째 치고, 주인공처럼 스스로를 인간으로부터 실격당한 존재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인간을 정의하는 단어책에 결핍과 불완전을 집어넣으니 굳이 완벽한 인간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오히려 주인공과 달리 인간실격의 정의를 다르게 내린 것에 감사하다.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져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타인을 도구로 생각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주인공은 인간내면의 추악한 모습을 잔인하리만큼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유해했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사상, 신념, 가치관 등을 여과 없이 표현했기 때문에 여느 책들보다도 더욱 위험했다. 불쾌하면서도, 불편하면서도 결국 주인공을 이해하고 공감한 내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추악한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라는 평생을 풀어내야 할 문제에 조금은 가까워진 듯싶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미지의 공포감을 견디기 힘든 걸 보니 인생이란 참으로 기구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