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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Mar 11. 2024

악인에게 서사는 필요할까?

[인문] <악인의 서사> - 듀나 외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    

 

책은 이 한 문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악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과 악인의 서사를 금하는 이들의 대립.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들과 무의식의 영역 속 부정적 영향을 염려하는 이들. 수많은 창작물 속 악인들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길래 오늘날 단두대에 올랐을까? 소설가와 문학 평론가, 비평가 등의 문학인들은 과연 악인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리고 정말로 악인에게도 서사가 필요할까?


출처 : Yes24


주인공의 시대는 지났다. 악인의 매력에 동조하는 독자들.     


최근 책이나 방송을 비롯한 창작물에 등장하는 빌런(악인)들은 과거와 달리 꽤나 매력적이다. 권선징악이 곧 정답이었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빌런이 주인공을 굴복시키는 장면이 간간이 보이기도 하는데, 심지어 주인공보다 빌런을 더 좋아하는 청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영화 <다크나이트>의 빌런 “조커”나 19세기 후반 다양한 추리소설에 등장한 “잭 더 리퍼” 등이 있다.     


이전에 절대적인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며 쓴 글이 두 편 있다. 첫 번째 글은 현재 사회문제로 붉어지는 “사이버 자경단”에 대한 비판으로 영화 다크나이트의 주인공인 배트맨이 과연 정의의 사도인지에 대한 물음을 담았고, 두 번째 글은 악인이 주연이 되는 장르인 “피카레스크”에 대한 단상을 옮겼다. 당시 이 두 개의 글을 연달아 쓸 땐 머릿속의 딜레마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나 보다. 과연 절대적 선과 악은 존재하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악인에게 왜 환호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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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으로 사람들이 악인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말해보자면, 세상이 더욱 세분화되고, 복잡해지고, 다양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와같이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면서 정의를 추구하는 시대는 지났다. 아니, 오히려 그런 시절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개인마다 생각하는 정의가 다르고, 서로가 갖고 있는 신념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이제 악인을 응원하는 이에게 손가락질하는 시대는 지났다.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에 대한 수용의 폭이 넓어진 오늘날, 우리는 서서히 악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사가 그만큼 위험해? 서사가 끼치는 영향.     


그렇다면 악인을 좋아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서, 왜 창작자들에게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을 금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작품 속 서사가 가진 힘이 너무 강력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서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인 <레미제라블>을 예로 들어보자.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주인공 장발장은 빵집에 침입하여 한 조각의 빵을 훔쳤다. 그는 절도죄와 과거에 행했던 밀렵행위, 불법 무기 소지 등의 경범죄들로 인해 5년의 형벌을 받게 되고, 감옥살이 중 4번의 탈옥을 시도하여 결국 19년의 형벌을 받게 된다.     


위 내용만으로 보자면 장발장은 엄연한 범죄자이기 때문에 이에 마땅한 형벌을 받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장발장에게 서사를 부여해 독자들로 하여금 감정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장발장의 본성은 선하다는 배경과 가난한 환경에서 7명의 조카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정환경, 그리고 출소 후 배회했던 성당에서 한 주교를 만나 회개했다는 스토리까지. 작품을 다 읽은 뒤 이 모든 서사를 받아들인 독자들은 장발장을 단순한 악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해보자. 법치국가에서 범법행위를 저지른 장발장은 명백한 악인이다. 그러나, 그의 서사를 온전히 받아들이다 보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빵을 훔친 것으로 여기거나, 불우한 환경에 처한 이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고 평가하곤 한다. 이것이 바로 서사의 놀랍고도, 무서운 힘이다.     




결국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 이제 왜 이러한 주장이 나타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악인의 수용, 그리고 서사가 주는 강력한 힘이 결국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자는 창작 윤리적 주장까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럼 과연 ‘악인에게 서사를 주어선 안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해 본다면 나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창작자와 독자들이 향유하는 자유와 권리의 폭이 늘어남에 따라 이를 완전히 금하는 것은 현시대에서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확실하게 내릴 순 없겠지만, 차선책은 존재한다. 바로, 악인을 자유롭게 바라보되, 해당 캐릭터의 서사에 너무 매몰되지 말 것. 창작자든, 독자든 어떠한 캐릭터를 악인으로 바라보았으면, 그 캐릭터는 악한 행동을 저지른 악인이다. 분명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 혹은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악인으로 지명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악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성적으로 캐릭터, 혹은 허구적 인물 그 자체로 바라보아야 한다. 악인의 매력에 끌리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악인의 서사에 물들어 그릇된 사상에 빠지는 것은 막아야만 한다. 결국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악인과 서사를 분리하고 구분할 수 있는 힘이다. 선인이 바라보지 못하는 세계의 그림자를 다양한 방면으로 보여주되, 그 그림자로 다가오지 못하게 막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맞는 악인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악을 아예 다루지 말아야 한다, 혹은 악인에게 목소리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쉽게 내리고 싶진 않다. 악은 도처에 존재하고 우리는 매일 매 순간마다 크고 작은 악의 돌부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린다. 그 돌부리가 우리의 나아갈 길을 모조리 막아버리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고 그 앞에서 주저앉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 잘 알아야 한다. 보는 것이 아는 것이며, 지식은 실천의 밑거름이 된다.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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