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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Jun 09. 2023

다크나이트는 과연 정의의 사도일까?

[지하칼럼#1] 끝나지 않은 논쟁, 정의란 무엇인가


평소 영화를 즐겨보지 않음에도 열렬히 사랑하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바로 <다크나이트>. 내 기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최고 걸작이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탄탄한 스토리와 화려한 영상미 때문도 있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철학적 물음 때문이다. 수천 년간 지속된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선 배트맨과 조커가 주역으로 등장한다. "배트맨"은 공권력을 갖는 경찰이나 검사가 아니지만 자신의 재력과 무력을 이용해 악인을 처단한다. 영화 속 대표적인 악당은 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캐릭터인 "조커"다. 조커는 상대방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사이코패스로 자신만의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조커는 미치광이로 불리는 자신과 정의의 사도로 불리는 배트맨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네가 추구하는 것만이 정의인가? 그렇다면 나의 정의 역시 정의가 될 수 있지 않나?   


모든 사람들은 정의를 추구한다. 사람들에겐 각자만의 정의가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정의를 전부 존중하다 보면 이 세상은 금세 혼란에 빠질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관습과 윤리, 과학기술 등에 의거해 절대적인 정의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법”“규율”이다.  

이러한 법과 규율은 국민 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지만 모든 이들의 정의가 합치될 수는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서양 근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하듯 모든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받아야 하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이라는 전제조건이 필수적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지키고 있는 법은 국민의 선거를 통해 뽑힌 국회의원이 정한 것이고, 좋든 싫든 우리는 절대적인 그 법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영화 <다크나이트>에 나오는 배트맨의 경우 그는 시민들의 선거로 인해 뽑힌 영웅이 아니다. 자경단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하는 것이지만 과연 그에게 악을 처단할 공권력이 있을까? 배트맨 역시 일반 시민 중 한 명이라면 과연 그가 악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을 벌할 권리가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듯 몇몇 시민들은 배트맨이 악을 소탕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 악인 한 명을 잡기 위해 도시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일반 시민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다고 하거나, 경찰이나 보안관, 검사들이 처리할 일에 무슨 자격으로 간섭하냐는 의견을 내세운다. 그 결과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은 극장으로 나오며 과연 악인을 처단하는 배트맨의 정의가 진정한 정의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현실에도 자경단이라 불리는 배트맨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최근 유튜브에서 급상승 인기를 누리며 하나의 컨텐츠 카테고리가 되어버린 “사이버 자경단”들이다. 이들은 경찰 대신 중고차 허위딜러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대신 그들을 소탕하거나, 미행과 잠복을 통해 오토바이 불법운전을 신고 하기도 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기자와 뉴스를 대신해 범죄자의 신상공개를 대신하는 자경단도 등장했다.     


나는 이러한 자경단이 늘어난 이유가 과거에 비해 더없이 추락해 버린 공권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범죄자에게 정당한 처벌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 결정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공무원 조직이기 때문에 권력기관은 언제나 소극적이고 보수적으로 해당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정의를 소탕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게 인간의 본능이다. 대한민국에선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이 제일 많은 책임을 진다.      


나 역시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정의구현”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방송 관계자나 공인이라면 절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섞어가며 범법자를 대신 나무라는 장면을 보면 나 역시도 통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정의구현”일까? 자경단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처형대에 올리는 건 바람직한 일일까?




범죄자를 권력기관에 신고하는 것은 시민의 참된 행위다. 하지만 나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주체가 개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과거로부터 인간은 한 개인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를 구성하고 각자의 “역할”을 분배해 왔다. 일반 시민들은 새로운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고, 범법자를 처벌하는 권력을 정부 및 기타 기관에게 맡겼다. 이러한 모든 권력기관은 좋든 싫든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때문에 범죄자를 처벌하는 주체는 한 개인이 아닌 권력기관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권력기관 이상으로 범죄자를 처벌하거나, 범죄자를 처벌하는 주체가 개개인에게 돌아간다면 사회를 지지하는 절대적인 법과 규율의 사회적 안전망이 무너지게 된다. 법과 규율, 도덕, 윤리 등 현시대의 절대적인 진리가 사라진 순간 인간은 혼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다. 통합된 절차와 질서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단 하루라도 살아갈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우리의 분노 에너지를 범죄자에게 모두 쏟아붓는 것보다 우리가 뽑은 권력기관과 권력자에게 분배하는 것이 더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한다. 정부에서 범죄자의 신원공개를 점차적으로 인정한 것 역시 우리의 분노 에너지가 권력기관에게 닿은 덕분이다.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억울한 사연을 전 국민이 알 수 있게 된 것도 우리의 분노가 권력기관에 닿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시민으로서 나서야 할 행동은 범죄자의 과거사와 사생활을 집접 파해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게 타당성을 증명하고 힘을 모아 요청하는 일이다.     


권력기관 역시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점진적이고 확실한 방향으로 “정의”를 바꿔나가야 한다. 명확하지 않은 정부의 행동과 법의 허점은 국민들에게 혼란을 야기할 것이고, 국민들의 혼란이 커질수록 국민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못한다. 그러한 불신뢰가 쌓이고 쌓여 오늘날의 "사이버 자경단"이 정부보다 더 큰 환호를 받게 된 게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화면 배트맨의 정의가 진리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혹은, 수 세기 후엔 조커의 정의가 새로운 사회의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300년 전까지만 해도 마녀사냥은 굳건한 진리로서 존재했고,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다처제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진리들은 시간에 따라 서서히 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변화가 다시 굳건한 진리가 되기까지는 대다수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와 비판적이지 않은 시각, 물타기와 가짜뉴스 같은 선동은 대중에게 건강하지 않은 신념을 갖게 한다. 따라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배트맨의 정의든, 조커의 정의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를 분별하고 나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오늘의 물음표로부터 - 자경단의 이름으로 당신의 손에 흉기가 주어 진다면 눈앞의 범죄자를 두고 당신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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