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고백> - 미나토 가나에
뉴스를 챙겨 보지 않은지는 2년이 다 되어간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저녁을 먹은 뒤 티비 앞 소파에서 30분은 꼭 뉴스를 보곤 했는데 이젠 자발적으로 뉴스를 보지 않는다. 뉴스뿐 아니라 인터넷 기사도 일부러 읽지 않으려고 한다. 정보화 시대에 최신의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뒤쳐지는 게 확실하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보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티비와 인터넷 안에는 자극적인 내용이 너무 많았다. 도태되더라도 자극을 받고 싶지 않았다. 맞서 싸우기보단 외면하고 도망치기를 선택한 것이다.
정보의 도피를 선택한 가장큰 이유는 인물에 대한 사건사고다. 처음 이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건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당시 유명 연예인의 스캔들 때문이다. 유명 아이돌 그룹의 남자 아이돌과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여가수의 연애 소식은 학교를 뒤흔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연예인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들이 누군지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왜 별것도 아닌 걸로 학교가 난리가 난 거냐?'고 물었다. 소란스러웠던 아이들은 나의 한마디에 정적을 만들어냈다. 친구들은 '너 문찐이냐?'라고 말하며 당시 트렌드에 뒤떨어지는 사람을 일컫는 유행어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친구들 무리에는 분명 나와 같이 연예인에 관심 없는 친구도 섞여있었는데 그 친구는 마치 예전부터 해당 연예인을 좋아하는 듯 팬심을 드러냈다. 친구들은 자신과 비슷한 그 친구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모습에서 절박함을 발견했다. 그는 무리에 섞이지 못하면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동물의 습성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듯했다. 나 역시 아차 싶어 집으로 돌아가 뒤늦게 해당 연예인의 연예기사를 찾아보고 그들의 웅성임에 어울리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그 스캔들은 묻혀버렸고, 또 다른 연예인이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때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누군가에 휩쓸려 타인의 구설수에 관심을 갖지 않기로.
미나토 가나에의 장편소설 <고백>에선 뻔하지만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여 현재까지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소재가 등장한다. 그 소재는 바로 "마녀사냥". 중세 유럽시절에나 유행했던 잔인한 학살은 현재까지도 끊이지 않고 그 수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당시에는 여러 사람들이 "마녀"를 만들어내고 그의 목숨을 끊어내는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방식이 많이 다르다. 현대사회에서는 피로 손을 더럽히지 않더라도 사람을 죽음에 몰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니까.
역시 아무리 잔인한 범죄자라도 제재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결코 범죄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재는 평범한 세상 사람들의 착각과 폭주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77
일본의 유명 장편소설 <고백>은 어느 초등학교의 종업식날, 자신의 반 아이들에 대한 여교사(유코)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자신의 딸을 잃은 여교사는 사실 자신의 딸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었고, 그 범인은 바로 이 학급에 속한 학생 중 두 명이라고 말한다. 교사는 침착하고 담담하게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며 간접적으로 두 살인자를 밝혔고, 그 두 명의 아이가 마신 우유팩에 HIV감염자의 혈액(에이즈 환자의 혈액)을 몰래 주사함으로써 살인자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다.
그녀가 두 아이의 우유팩에 HIV감염자의 혈액을 넣은 것은 그녀의 복수이자 제재이다. 우리 생활에 가득한 제재, 즉 현행법들의 존재의의는 범죄자를 위한 것이 아닌 평범한 일반인들의 폭주를 막기 위함이다. 살인, 폭행, 갈취 등에 제재가 없다면, 엄격한 법의 공포에 떨 만큼 강력한 제재가 없다면 이 세상은 폭주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법에는 허점이 존재하고, 그 허점은 곧 일반인들의 착각과 세상의 폭주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허점의 대표적인 예시는 이 소설 속에서도 나온 법, 소년법이다.
한국에선 소년법이라는 명칭보다 "촉법소년"이란 단어가 더욱 익숙할 것이다. 워낙 미디어에서 소년법에 해당하는 범죄를 촉법소년으로 일컫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과거 16세 미만 청소년이 살인을 저질러도 소년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여 14,15세 아이들에 의한 흉악 범죄가 빈번히 발생하여 2001년엔 그 연령을 14세로 낮추었다. (한국에서도 물론 비슷한 움직임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배경은 초등학교이다. 그러니까 14세보다도 더 낮은 아이들이 법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14세 미만의 두 아이는 교사의 딸을 죽였지만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결국 평범한 사람의 착각과 폭주를 막기 위한 제재가 작용하지 않았던 것. 국가가 제재를 할 수 없으니 교사는 스스로 제재를 감행한다. 물론 개인적인 분노가 가득 담긴 제재일 테지만.
슈야는 우유를 맞기 전과 똑같은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눈이 뭐라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네게 나를 벌할 권리가 있어?" p.85
충격적인 교사의 제재사건 이후 학급의 분위기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직접적으로 딸을 살인한 아이(나오키)는 자신이 곧 에이즈에 감염될 것이라며 스스로 집에서 고립된 채 점점 미쳐가기 시작했고, 간접적으로 아이에게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아이(슈야)는 자신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태연하게 학교에 다닌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교사 유코의 "공론화"때문에 당사자들끼리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유코의 고백 이후 두 아이에게는 당연하게 "살인자"라는 딱지가 붙었고,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다니던 슈야는 점차 왕따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에게 슈야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저 "너희들이 나를 벌할 권리가 있어?"라고 묻는 시선을 보낼 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인간의 상식이다. 그러나 과연 같은 학급의 친구들이 슈야를 벌할 자격이 있을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당연 나쁜 사람이므로 곁에 있는 우리는 그를 비난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일까? 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그를 비난하며 또 다른 사회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걸까? 학급 아이들이 슈야를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그 벌로 왕따라는 제재를 가하는 것은 사회 심리학적 용어에 등장하는 "다원적 무지"로부터 비롯된다.
"다원적 무지"는 어떤 문제에 대해 소수의 의견을 다수의 의견일 것이라고 잘못 인지하거나 또는 다수의 의견을 소수의 의견일 것이라고 잘못 인지하는 것을 나타내는 사회 심리학적 용어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물타기"와 비슷한 개념인데, 자신만의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특정 그룹의 의견이 곧 나의 의견일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게 곧 정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에 비해 권위가 높은 교사의 말은 모두 진실일 것이라고 믿고, 주위 대다수가 동조하기 때문에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조차 하지 않는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공인, 전문가, 인플루언서 등 사회적으로 유명한 것이 자신의 이점이 되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사회적 시선이다. 사회적으로 안 좋은 시선을 받게 되면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고 이는 곧 그 바닥에서 수명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일반인들과 다르게 그들에겐 "사회적 매장"이라는 특별한 제재수단이 존재한다. 사회적 매장은 평범한 제재수단과 달리 권력자에 의해 행해지지도 않고, 사건의 당사자에 의해 사건의 규모가 정해지지도 않는다. 오직 제3자의 평가에 의해 자신의 가치가 변화하는 아주 독특한 형태의 제재다.
마약을 한 연예인을 비난하고, 연예인의 사생활을 구박하며, 과거를 캐낸 뒤 폭로한다. 인터넷 댓글창을 보면 마치 그들이 수천 명의 판사가 되어 제각기 다른 판결문으로 죄인을 심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들은 사이버수사대보다 더 빠르고 집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한 비난과 악성댓글, 사생활 들추기와 같은 행동은 정의를 위해서라면 용서받을 수 있는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쁜 사람을 가려내고 그것을 처벌하는 것은 나쁜 행위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자신이 또 다른 제재를 가하는 줄도 모르며, 자신이 그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줄 착각하면서 또 다른 사건을 만들어낸다.
물론 범죄자를 옹호하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범죄자에게 가하는 국가나 이해관계자의 제재의 비중보다 여론, 타인, 제3자가 가하는 제재의 비중이 더 큰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제재를 받는 것에 대해선 당연하게 여기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자신이 누군가를 벌하는 것에 대해선 제재를 원하지 않는 모순 속에서 우리는 과연 이러한 행동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재 상황에 맞는 제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가해자는 익명성과 다수의 그늘에 가려질 것이고, 평범한 사람들은 착각에 빠져 폭주하게 되고 말 것이다. 부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제재 시스템과 스스로의 가치판단을 근거로 한 평가가 잘 어우러져, 현대판 마녀사냥이 끝을 맺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