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민음사)
누군가에게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세상을 살다 보니 내가 우물 안 개구리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나의 우물은 너무나도 깊었고, 때문에 먼 지하에서 바라본 세상은 더욱 좁아 보였다. 비로소 우물 밖으로 나온 20살의 나는 번쩍 뜨여진 시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우물 안과 달리 세상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게 되자 다시 우물 안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우물 밖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헤르만 헤세를 대표하는 소설인『수레바퀴 아래서』는 성장기 소년의 고뇌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헤세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어렸을 적 엄격한 신학교의 환경에서 자랐고 그의 사춘기 시절 역시 순탄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 소설을 자서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데미안』과『싯다르타』와 비슷하게 헤세는 이 소설에서 역시 우리에게 "나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신학교에서도 다른 학우들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야망과 인내심으로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 걸까? 그것은 한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p.64
소설은 어느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소심한 소년인 "한스 기베란트"의 등장으로 전개된다. 비록 규모가 작은 마을이었지만 한스는 자신의 동네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고, 그의 주변 사람들 역시 그의 재능을 칭찬하며 주(洲)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입학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한스 역시 자신을 우러러보는 듯한 그들의 시선이 나쁘지만은 않았고, 공부를 잘하는 것은 곧 자신의 행복이자 부모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후, 시험을 보기 위해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한 한스는 시험 날이 다가올수록 미칠 듯이 불안감을 느꼈고, 3일 간 진행되는 시험기간에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거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구기며 압박감을 느낀다.
대입 시험을 치러본 적이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교육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교육열이 뜨거운 우리나라에선 학원을 다니지 않는 청소년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통계자료에선 가정의 생활비 30% 이상이 사교육비에 쓰이고 있다고 하던데, 집 근처 학원가가 항상 호황을 이루는 것을 보면 앞으로는 더욱 그 수치가 올라갈 듯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쏟는 에너지의 대부분이 교육에 대한 것이니 채 20년도 살아보지 못한 아이 역시 인생의 전부를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동그라미의 개수와 성적의 높낮이에 따라 가정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자신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니 아이 인생의 전부가 공부라고 말하는 건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겠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p.172
한스는 주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여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신학교는 기숙학교이기 때문에 한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독립하여 혼자 살아가게 된다. 다른 아이들도 상황은 비슷했는지 입학식이 있던 첫날밤 많은 아이들이 남몰래 눈물을 훔치거나 외로움에 빠진다. 한스는 소심한 아이였기 때문에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친구도 거의 없어 이전처럼 공부에 열중했지만, 신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 "하일러"와 친해지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오로지 공부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하일러는 혼자 망상을 즐기거나 시를 쓰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고, 그 모습을 본 한스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오직 공부와 성적만으로 인생이 귀결되었던 한스에게 찾아온 자유는 독이라고 느껴질 만큼 괴로웠고, 또 잔인했다. 스스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또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었기에 우물 밖의 세상은 한스에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죄악이자, 부모의 기대감을 저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한스를 비롯한 현실 속 대부분의 아이들은 수레바퀴 아래서 벗어날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시야가 좁은 이유는 우물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지 개구리의 탓이 아니다. 한 방향 밖에 볼 수 없는 우물을 만든 존재는 개구리가 아니니까.
이 소년은 항창 피어오르는 꽃다운 나이에 갑자기 꺾여 즐거운 인생의 행로에서 억지로 벗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p.262
지금껏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에 대해 큰 회의감을 느끼고, 스스로의 가치를 형성하는 것에 적응하지 못한 한스는 결국 방황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또래 아이들과는 더욱 어울리지 못하게 되고, 그토록 열심히 했던 공부에도 손을 놓아버리게 된다. 마침내 신경쇠약으로 인해 학교를 중퇴하게 된 한스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시계 수리공 일을 맡게 되지만 우울한 감정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오직 공부로만 이루어진 세상이 아닌 다른 환경을 경험하며 한스는 "다양한 사람과 인생"을 느끼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발견하며 점차 단단해지는 듯싶었지만 이내 싸늘한 시체로 삶을 마무리하게 된다.
한스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것은 비단 한스 개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 누구도 한스에게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방법 역시 가르쳐주지 않았다. 좋은 성적을 거두어 칭찬을 받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고,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인생의 가장 큰 가치라고 한스가 느낀 것은 무의식적으로 사회의 시스템에 잠식당했기 때문이다. 수레바퀴처럼 매번 같은 속도와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의문을 갖고, 벗어나고 싶지만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가 고뇌에 빠지며 스스로를 자책한 게 아닐까. 힘들게 살지 않으려면 생각을 비우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이 아이에게 정말 맞는 말인지 의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해보는 것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도 이 말에 동의한다. 나 역시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새로운 감정을 찾아내고, 그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으니.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극은 사람에게 큰 독이 되는 법. "하고 싶은 건 시험이 끝나고 해" "어른이 되고 난 뒤에 해" "대학을 졸업한 뒤에 해"라고 계속해서 우물 안에 가둔 뒤 갑작스럽게 세상을 마음껏 살라고 하면 어느 누가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유를 느껴보지 않은 이들이 겪은 자유는 낯설고 이질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안정한 마음을 지우려 개구리들은 다시 스스로 수레바퀴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헤세의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을 읽다 보면 "시스템에 굴복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라"같은 혁명적인 주제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주체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나의 삶"을 살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이미 수레바퀴 아래에서만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껴본 나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다짐이다. 하지만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이상 계속해서 우물 안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다. 다만, 한스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는 없으니 주위에서 다그치더라도 개의치 않고 천천히 나의 속도로 우물을 벗어나야겠다. 스스로 인생의 수레바퀴를 만들어 굴려나갈 수 있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