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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Jun 29. 2023

만약 주인공이 악인이라면?

[지하칼럼#3] - 피카레스크를 중점으로


우리가 주인공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상형에 가까운 아름답고 멋진 외모, 이상향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성격 등 독자가 주인공에 입덕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중 독자가 주인공이라는 캐릭터에 입덕하기 위한 필수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해당 캐릭터의 상황에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냐는 것이다. 주인공이 위험에 빠지면 나 역시 덩달아 긴장되고,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쳐 승리하면 나도 모르게 희열을 느낀다. 그런데 만약 내가 좋아하는 주인공이 악인이라면 어떨까? 매력적인 그의 가치관에 이끌려 입덕했지만 사실 그 신념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는 계속해서 주인공을 좋아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악인인 작품 : 피카레스크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 주를 이뤘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주인공이 악으로 비치는 작품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의 일부, 혹은 전체가 악인으로 등장하는 장르인 "피카레스크"는 주인공은 언제나 선인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한 문학장르로 주로 악인의 심리 상태나 신념 등을 드러낸다. 한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 혹은 현재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독특한 특징 때문에 그 이름을 따 주인공의 일화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한다는 “피카레스크 구성”이 생겨날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다.     


피카레스크 형식의 작품은 순수문학보다는 장르소설,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주인공이 악인이라는 캐릭터성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일본의 만화 『데스노트』의 주인공 ‘라이토’와 네이버 웹툰 『퍼니게임』의 주인공 ‘1번’ 『살인자ㅇ난감』의 주인공 ‘이탕’ 등이 있다. 이들은 사회가 규정한 정의(선)를 따르기보단 불의(악)를 저지르며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을 법한 신념들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악당이 할법할 말들과 행동을 주인공이 대신하기 때문에 독자는 누가 악당인지 헷갈리곤 한다. 하지만 기존의 캐릭터에 반대되는 악인의 매력이 되려 독자들을 빠져들게 만든 게 아닐까? 우리가 현실에서도 나쁜 매력의 소유자에게 묘한 끌림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피카레스크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악이라고 칭하는 상대(작품 속 세계관, 현실, 독자)에게 자신의 정의를 드러내며 독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나의 정의는 왜 악으로 취급받는가?” “네가 주장하는 정의 역시 악일 수도 있지 않은가?” “선이 악을 처벌하는 것은 진정한 정의인가?” 이처럼 피카레스크 작품의 주인공이 던지는 질문들은 기본적으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표를 전제로 삼아 독자들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선과 악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작가는 왜 주인공을 악인으로 그렸는가?


피카레스크 장르의 작품들이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바로 선과 악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선과 악은 인간이 임의적으로 만들어 낸 표현일 뿐이지 양가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스노트』에서 범법자를 처벌하는 라이토의 정의는 작품 속 유가족에게 선일 수 있다. 『퍼니게임』에서 교수(2번째 5번)가 타인을 배신하고 상금을 획득하는 것은 수백억 대의 빚을 지고 있는 가정의 가장으로서 칭찬받을 만한 행동이다. 스텔라장의 노래 <빌런>의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누군가는 다른 곳에서 찬양받는 선인일 수도 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개 say …
네가 제일 미워하는 누군가는 사랑받는 누군가의 자식 say …
- 스텔라장 <빌런> 中     



이렇듯 선과 악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황, 시각,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다. 과거 ‘마녀’라고 불리는 인간을 화형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고, 담배는 약초로 취급되어 아이와 여성에게 권해지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시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게임을 질병으로 취급했지만 지금은 하나의 문화로서 받아들인 것처럼 선과 악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피카레스크 장르의 “절대적 악과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제의식을 통해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악과 선을 되돌아보고 더 나은 “사회적” 정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피카레스크 형식의 작품에 접근할 때 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작품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행동이 선이든 악이든 우리 사회는 그를 “악”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결말이 주인공의 승리로 끝날 경우 범죄미화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작품은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나치게 주인공에 몰입하다 보면 주인공의 악이 곧 선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피카레스크 장르의 작품을 만들 때 창작자 역시 현시대에 부합하는 절대적 악을 모호하게 그려내면 안 되고, 잘못된 사상을 주입하려는 의도로 작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성은 특히 아직 가치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더욱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선과 악은 그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도 쉽게 뒤집힌다. 아직도 인간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한 것과 같이 그 누구도 선과 악에 대해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바라보는 작품 속 주인공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했다면 가끔은 그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패배하는 악당의 입장에선 주인공이 악당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선이라고 믿었던 나의 행동 역시 누군가에겐 악으로 보일수도 있지 않은가.


오늘의 물음표로부터 - 주인공이 악인이라면 우리는 그를 응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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