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하 Jun 16. 2023

부모가 바라는 착한 아이로 산다는 건

[만화] <여중생 A> - 허5파6

착한아이가 되는 방법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착한 아이로 자라길 바란다. 친구들과 교우관계도 원만했으면 좋겠고,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고, 부모의 말도 또박또박 잘 듣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엄친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픽션으로 가득한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도 완벽해 보이는 인물에겐 한 가지쯤 결함이 있기 마련. 게다가 가족은 대체로 같은 공간에서 보기 싫은 모습까지 다 봐야 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눈에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착한 아이가 되길 평생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부모가 바라는 착한 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착한 아이가 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한국에서 착한 아이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저 부모의 말씀을 100% 수용하고 부모의 가르침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제기하지 않으면 된다. 부모님이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네”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만 행동하면 된다. 그렇게만 한다면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은 전무할 것이고 가정에선 큰소리가 나지 않는, 더없이 행복한 가정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니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선 부모가 입력한 대로 답을 출력하는 수동적인 기계가 되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극단적인 상황을 예시로 든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실제로 “착한 아이”라고 불리는 가정의 아이는 대체로 수동적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의 특이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남들보다 튀거나 개성 있는 부분, 혹은 또래 아이들과 잘 섞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부모는 자녀의 특이점을 억압하면서까지 자녀가 평범하길 원한다.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바로 착한 아이가 되는 길이다. 또래 아이들보다 튀는 걸 좋아하는 부모는 별로 없지만 한국에선 특히 그 정도가 과할정도로 불안해한다.     


네이버의 웹툰 작가 허5파6의 대표작 <여중생 A>에서는 폭력적인 가정환경과 억압적인 부모로 인해 착한 아이가 되지 못하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미래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인해 극도로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였고, 이로 인해 친구들과 원만한 교우생활을 하지 못해  비정상취급을 받는다. 미래의 친구 백합 역시 그녀의 꿈인 글쓰기보다 중간고사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부모 때문에 착한 아이가 되길 강요받는다. 결국 두 아이는 부모에게 착한 아이가 되고 싶기 때문에 꿈의 발판이 될지도 모르는 특이점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아이가 볼 수 있는 색깔은 오직 부모에게 달렸기 때문에


“왜 자식은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는 가. 이미 빛을 본 자식으로서 항변하는 이 문장은 한낱 투정으로 남을 뿐이다. 부모는 그 이름만으로 자식의 첫 숨과 그 환경을 손에 쥐고 농락할 권리를 가진다.” - 미래의 독후감 감상문 中    


농락이라는 표현이 다소 거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단어를 제외하곤 자식의 입장으로서 굉장히 공감이 된 문장이다. 부모가 자신들이 원하는 착한 아이를 선택하지 못하듯, 자식 역시 착한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선택이 존재할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다. 그러나 이 관계의 우위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다. 부모는 자식의 환경을 만들 수 있지만 자식은 그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식의 환경을 조절할 수 있는 권리가 부모의 손에 먼저 쥐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설 속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주인공 미래는 가정폭력의 환경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 불륜 등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애초에 마련되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의지할 수 있는 미래의 어머니조차 그런 아버지에 대해 “너희 아버지가 원래는 좋은 사람인데 술을 먹어서 그러시는 거야”라고 미래에게 말한다. 엄마의 말을 들은 미래는 혼란스럽다. 분명 내가 생각한 아빠는 나쁜 사람인데 나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나와 같이 피해를 입은 엄마가 아빠를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에게 욕하고 때리더라도 사실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던 건가? 부모가 만들어낸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미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백합의 가정 역시 마찬가지다. 백합의 가정은 재정적으로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겉으로 보기엔 별 문제없는 화목한 가정이지만, 백합의 아버지는 오직 백합의 성적에만 관심을 쏟는다. 글쓰기 같은 부질없는 일을 하니 성적이 그 모양 그 꼴이라며 전교 19등의 나름 준수한 성적에도 아버지는 백합을 칭찬하지 않는다. 백합의 어머니 역시 열심히 공부하고 착하게 살아야 나중에 남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며 오직 남편에게 사랑을 받는 것만이 여성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두 아이가 스스로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와 아이가 자라날 수 있는 가정환경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렸다. 아이는 이러한 가정에서 도망치지 않는 한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가 만든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주위의 어른들은 아이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자신만의 꿈을 찾으라고 말하지만 반복되는 가정폭력과 오직 공부만을 강요하는 환경에서 아이가 과연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낼 수 있을까?     



아이라면 한번쯤은 느껴봤을 두려움, 착한 아이 콤플레스


“행복을 기대하거나 경계했던 일련의 행동들 자체가 큰 착각이었다. 삶의 의지를 쥐고 있는 건 내가 아닌데.” - <여중생 A 4권> p.78     


이러한 결과로 인해 아이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다.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부모의 환경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이고 착한 아이가 되는 것보다 더 심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꿈을 찾은 아이들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린 아이가 꿈을 찾게 되면 아이는 꿈을 갖게 된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낀다. 부모의 뜻을 어기고 평범한 아이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는 건 그 무엇보다도 부모를 실망시키는 일이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야. 부모님이 글은 서울대 간 다음부터 쓰게 해준다고 했거든...” - 백합     


부모는 꿈을 찾은 아이를 타이른다. 하고 싶은 것은 알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 너의 자유를 보장해주겠다. 대신 성인이 된 이후에, 혹은 대학에 간 뒤에 너의 꿈을 펼치렴. 이처럼 아이의 꿈은 대학에 가기 위한 제물로서 희생된다. 자신만의 꿈을 찾는 게 당연할 나이에 꿈을 꾸는 것조차 부모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는 감정의 고통이 참 안타깝다. 나 또한 느껴본 감정이기 때문에 백합의 고통이 더욱 쓰게 느껴진다. 


물론 나 역시 부모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모든 것에 절대적인 때와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 시기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대체로 효율적이다. 그러나, 20년간 수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살아온 아이가 성인이 되었다고 단번에 자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자유가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란 아이가 아무런 혼란 없이 자신의 꿈을 찾아갈 수 있을까?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배우지 않았던 아이에게 갑작스럽게 맞이한 자유는 오히려 독이 되어 다가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부모의 말을 듣는게 정답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정해져 있는 삶을 택하고 만다.         


아이는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인 것일뿐.


“아직 16살이잖아요. 너무 어른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요.” - 재현


이제 부모가 자식의 삶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는 인정해야 한다. 한 생명체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그 힘은 얼마나 대단하고, 또 얼마나 잔인한가. 부모는 이 거대한 힘의 주체이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책임감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으면서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려는 아이를 탓하는 자들을 나는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 미래는 아직 16살이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다. 부모가 겪어온 인생의 절반도 살아보지 못한 “아이”일뿐이다. 아이는 어른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어른은 아이를 이해할 수 있다. 어른 역시 아이의 시기를 겪어왔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더욱 이해하고 바람직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쪽은 부모다. 미성년의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부모에게 탓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느 누구에게 탓할 수 있겠는가. 


혼자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숙이라는 단계로 아직 향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아이는 아이인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말하는 착한 아이를 바라기 전에, 내 자식이 어떤 아이인지 먼저 생각해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밑그림에 색을 칠하는 건 아이지만, 다양한 색연필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부모라는 존재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과 독후감의 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