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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Jul 03. 2023

80년대 발라드와 SF의 공통점

[소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 이유리 외

 

MZ세대에 속한 20대 중반의 나이지만, 내 핸드폰 속 음원 어플에는 놀랍게도 80년대 가수 장혜리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라는 곡이 가장 많이 듣는 곡 10위권 안에 안착해 있다. 혼자 노래방에 가면 김완선의 <이젠 잊기로 해요>와 정수라의 <환희>를 즐겨 부르고, 매달 돈을 내면서까지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을 컬러링으로 설정해 놓는다. 별명 중 스스로가 지은 "애늙은이"라는 별명을 가장 사랑하는 만큼 나는 옛날 노래를 사랑하고, 모든 옛날 것을 사랑한다.


내가 옛날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가사와 멜로디가 좋은 이유도 있지만, 그 노래가 만들어졌을 때의 과거를 간접적으로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시대의 끝물에 태어나 부모님의 품 안에서 살짝 맛본 게 전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립고 궁금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발라드의 황금기가 저물고 음원 차트에 아이돌, K-POP, 힙합 등의 노래로 가득 차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 세계인들이 한국의 아이돌을 따라 춤을 추고 한국어로 된 가사를 따라 부를 줄 누가 알았겠느냐. 인간은 오직 현재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과거를 경험할 수 없고,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나 역시 옛날 노래를 통해 과거를, SF소설을 통해 미래를 어렴풋이 맛볼 뿐이다.


출판사 자이언트 픽에서 엮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5명의 현대작가가 쓴 소설을 모은 SF소설집이다. 목차는 총 5개의 소설과 1편의 발문으로「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이유리) /「폴터가이스트」(김서해) /「수브다니의 여름휴가」(김초엽) /「미림 한 스푼」(설재인) /「뼈의 기록」(천선란) /「남은 사랑을 볼 수 있다면」(김겨울)이 있다. 모든 소설이 SF적 요소에 치우쳐 있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환상에 초점을 맞추어 인물들의 서사를 표현해 냈다.



이미 공상과학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소설 속 공상과학이 현실과 멀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는 공상과학을 이미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초엽의 소설「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속 배경은 인공장기를 배양하고 이식하는 게 보편화된 세상이다. 주인공은 <솜솜 피부 관리숍>에서 물고기의 비늘과 곰의 털 등 고객이 원하는 커스텀 인공피부를 만들고 이식하는 일을 보조하게 된다. 그러던 중 자신의 피부를 금속으로 덮어달라는 한 고객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 고객의 정체가 인간이 아닌 인간화 시술을 한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필멸자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금껏 혁신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뤄냈고, 이로 인해 기대수명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인공장기를 결합하거나 육체 일부분에 기계를 부착하는 사이보그화 역시 공상과학의 영역에서 현실의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된 안드로이드는 왜 다시 기계가 되고 싶어 하는 걸까? 다시 기계가 되고 싶다고 의뢰한 안드로이드 “수브다니”는 다시 녹슬고 싶기 때문에 기계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필멸자는 불사를 바라고, 불사자는 필멸을 꿈꾸니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솜새끼”라고 불리는 태양계 관광청의 절대자가 등장해 지구는 곧 자신들에 의해 멸망할 것이며, 대한민국의 작가 중 한 명이 만들어낸 시나리오대로 지구를 파괴하겠다는 설재인의 소설 「미림 한 스푼」 역시 우리가 이미 겪고 있는 공상과학 중 하나이다. 솜새끼는 대한민국의 작가 10명을 선택해 지구멸망 시나리오를 쓰게 하는 초거대 서바이벌을 열었고, 전 세계 사람들은 한국 작가들의 토론과 시나리오를 생중계로 시청한 뒤 자신이 응원하는 작가에게 투표한다. 이 투표로 1등을 한 작가의 시나리오대로 지구는 멸망하게 되고, 최종 선정된 작가에게 투표한 지구인들은 우주로 보내져 계속해서 삶을 이어간다.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절대자의 장난이지만, 이 장면 어딘가 익숙해 보이지는 않은가?     


대국민 서바이벌 프로그램, 온라인 투표. 실시간 시청자 참여 콘텐츠 등 한국에서는 이미 익숙한 미디어 방식이다. 일련의 투표조작 사건으로 인해 현재는 빈도가 많이 낮아졌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티비 속 대부분의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에서는 시청자들의 투표로 인해 참여자의 순위를 나눴다. A등급과 F등급, TOP10과 탈락자 등 시청자들은 화면 밖의 절대자가 되어 인간의 등급을 매기고, 성공과 실패를 나누었다. 결국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자의 존재'라는 공상과학은 다수의 익명성 평가로 개인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다가오는 공상과 실현되는 과학 

    

그리 멀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천선란의 소설「뼈의 기록」에선 인간을 대체하는 로봇 ‘로비스’가 등장한다. 로비스는 인간의 시신을 대신 처리하는 장의사 안드로이드로 인간의 장례 의식을 대신 수행한다.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맞이하는 타인의 죽음이란 어떤 의미일까. 견딜 수 없는 애도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 걸까? 불필요한 감정은 애초에 느끼지 않는 게 최선일까? 소설의 마지막에서 로비스가 그의 친구 ‘미미’를 떠나보낼 때 인간에 대적할만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장면을 본다면 아무래도 로봇이 인간의 감정만큼은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불가능의 영역으로 믿었던 인간의 감정대체까지 가능한 세상도 공상과학에는 존재했다. 이유리의 소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에 등장하는 감정전이센터에선 서로의 합의하에 인간끼리 감정을 전이할 수 있다. 육 개월 전 애인과 헤어진 주인공 '수진'은 자신의 감정을 구매하겠다는 친구 '영인'의 제안에 따라 남아있는 사랑의 감정을 영인에게 전이한다. 수술 이후 '수진'이 가슴 한편이 텅 빈 구멍처럼 공허해지는 부작용을 느끼자 '영인'은 소개팅을 통해 새로운 감정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 한다. '수진'은 새로운 남성과의 데이트로 공허한 느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남성이 과거에 4번이나 감정을 전이했고 이별할 때마다 감정전이를 통해 남아있는 사랑을 지워낸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혼자 생각에 잠긴다.


과거에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거나,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범위만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보다 기술의 발전은 훨씬 비약적이었고, 이제는 인간 자체를 대체할 수 있다는 공상이 현실이 되었다. AI의 발전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산산조각 난 지 오래고, 지금 당장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AI로 인해 일자리를 걱정하고 있다. 지금이야 당장의 일자리를 로봇에게 빼앗길까 걱정하고 있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인간이 아닌 로봇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 역시도 설마라는 생각이지만 공상과학 속 이야기가 점차 현실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설마가 사람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5개의 SF소설들이 한 곳에 엮인 이유를 생각해 본다. 분명 소설 속 이야기들은 현재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공상소설이지만,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공상의 아름다움과 과학의 위대함이 아닌 그 세상 속 사람들의 이야기다. 감정을 전이할 수 있는 세상과 검은 구가 만들어내는 환청을 들을 수 있는 세상, 인간의 표피에 인공피부를 이식할 수 있는 세상과, 절대자로 인해 지구가 곧 멸망하는 세계관, 그리고 인간을 대체하는 로봇이 당연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설 속 세상을 경험해 볼 수 없지만, 그 상황 속 인물들의 서사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SF소설이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가 아닐까? 1980년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그 시절의 발라드를 듣고 그 시대 속 사람들을 떠올리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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