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

두려운 직면

by 지현

“더러워”

내 얘기를 들은 진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멍했다. 아... 아...? 진희는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건가? 말하지 말걸 그랬나? 어릴 때부터 단짝으로 지내온 진희라면 내 얘기를 잘 들어줄 줄 알았다. 내 고민을, 내 마음을 헤아려 줄줄 알았다. 진희의 반응에 외로움이 밀려와 폐와 심장 위장을 꽉 채웠다. 외로움이 꽉 깨문 어금니 사이로 미어져 나왔다. 나는 꺽꺽거리는 소리를 통제할 수 없어 팔뚝으로 입으로 가리고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느라 앞이 보이지도 않는 눈을 감고 뒤돌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통수에 대고 소리 지르는 진희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지호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아니 그전에 버스 안에서 내 마음에 바람이 불었을 때부터 나는 진희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특별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을 나누고 싶었고, 그게 여자라는 것, 나와 같은 성별의 존재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진희 아줌마와 했던 성교육에는 몸에 대한 얘기도 있었지만 사랑에 대한 내용도 있었고, 여자와 남자의 사랑에 대한 얘기, 남자와 남자의 사랑 얘기, 여자와 여자의 사랑 얘기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을 나누게 되는 건지 아주 자세한 얘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동성 간의 사랑도 존재하고 그 사랑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거라고 했다. 지호에 대한 마음이 이런 걸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희 아줌마의 성교육을 같이 받은 진희와는 이런 얘기를 함께 나눌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내 마음, 내 생각, 감정상태를 잘 들어주고 질문해 주고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뿌연 머릿속이 명료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더럽다니. 세상에 오롯이 나 혼자만 존재하게 된 것 같았다. 언니들도, 엄마 아빠도,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는데 나는 누구에게 얘기할 수 있을까. 지호가 했던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진희에게 들려주며 이해하고 싶었다. 이제 그럴 수 없겠지. 막막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쉬려고 천변을 달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더운 밤, 포장된 길이 내뿜는 낮의 열기를 들이마시면서 뛰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이 진희에 대한 원망과 지호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지웠다. 집에 돌아오는 길 마주치는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들도 나를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진희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진희가 무슨 얘기를 한다고 해도 들으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교실에서 다른 애들이 다 보는 곳에서 울 수는 없었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지만 내 발은 제멋대로 학교와는 반대방향을 향했다. 진희와 마주칠까 봐 골목골목을 돌아 동네와는 조금 먼 산책로 입구에 도착했다. 한 여름의 빽빽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울창한 나무 덕에 숲 속은 시원했다. 고막이 울리도록 울어대는 매미덕에 정신을 잠깐 딴 데 팔 수도 있었다. 역시 숲이 좋구나. 어릴 때부터 속상할 때는 숲을 걷곤 했다. 눈으로는 연두 녹색 푸른색들의 향연을 즐기고, 코로는 나무 냄새 풀냄새를 들이마시고, 길가에 핀 꽃이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과 하나하나 살펴보며 인사하고, 새소리, 벌레 우는 소리에 취해 걷다 보면 어느새 속상했던 마음은 아득해졌다. 그래 오늘도 또 그렇게 걷는 거야.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 생각할 시간, 마음 정리할 시간, 나는 그렇게 시간을 갖고 마음을 다독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진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어느새 진희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 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겠지. 나한테 전화하고 싶을 텐데. 전화를 꺼야겠다. 가방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전원을 껐다. 지금은 전화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운동화 앞코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 걸음 한 걸음 꾹꾹 눌러 걸었다. 이 시간에 숲 속에 조성된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은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가는 남학생인지 여학생인지 알 수 없는 존재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은 다행히도 잘 없었다. 그늘 때문에 시원했지만 너무 열심히 걸어 그랬는지 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차 손수건이 없네.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라 늘 손수건을 챙겨야 했다. 정신이 없었는지 오늘은 깜빡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새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배고프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으니 배고플 때가 되었다. 시계를 보니 지금 학교로 돌아가면 급식을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돌아가자 가서 밥만 먹는 거야. 진희랑 마주치지 말아야지. 밥 생각을 하니 기운이 났다. 방향을 돌려 학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교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침 점심시간 종이 울렸는지 복도가 시끌시끌했다. 나는 가방을 건물에 붙어있는 관목들 사이에 던져놓고 급식실로 향했다. 우리 반 애들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얼른 식판을 집어 들고 배식구에 섰다. 카레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오늘 급식은 카레, 생선가스, 샐러드, 김치, 크림수프다. 내가 좋아하는 거네. 무슨 일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건지도 잊고 기분이 좋아졌다.

눈에 가장 띄지 않는 구석자리에 입구를 등지고 앉았다. 멀리서 정아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야 저기 연우 아니야? 진희야 연우 밥 먹고 있다.”

생선가스 한 덩어리를 한 입에 욱여넣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급식판과 수저를 챙겨 퇴식구로 재빨리 걸어갔다. 진희와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멀찍이 풀 죽은 진희의 모습이 보였다. 진희가 내 시선을 알아채기 전에 고개를 돌리고 급하게 뒷문으로 급식실을 빠져나왔다.

관목 사이에 던져놨던 가방을 챙겨 들고 교실로 갔다. 책을 꺼내려고 사물함 문을 여니 편지 봉투가 툭하고 떨어졌다. 봉투에 그려진 고양이를 보고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누가 봤나 싶어 주위를 한 번 살펴보고는 떨어진 봉투를 집어 사물함에 던져 넣었다. 진희가 쓴 걸까? 몰라.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들고 사물함에 있는 편지를 챙겨 교실을 나섰다. 교문을 나와 한참을 걸어 천변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편지를 읽어야지. 작은 고양이 스티커로 봉인해 놓은 봉투를 툭하고 뜯었다. 편지지에 진희의 글씨가 또박또박 쓰여있었다.

연우에게.

연우야...

‘연우에게’라는 글씨를 읽자마자 눈물이 또르르 흘러 편지지 위로 떨어졌다. 그냥 벌써 다 괜찮아진 것 같았다. 편지를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진희 아줌마가 연습한다는 비폭력대화가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났다.

아지트로 가볼까? 진희가 너무 보고 싶었다. 나는 또 전속력으로 뛰어서 카페 아지트로 향했다.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지트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서 오세요~’하는 아줌마의 소리가 로스팅룸 안쪽에서 났다.

“연우 왔니?”

아줌마가 환한 얼굴로 맞아줬다.

“진희 학원 갔는데. 혼자 왔어?”

“네.”

“연우 시원한 거 먹을래? 디카페인 에스프레소로 아포가토 해줄까?”

아포가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 음료다. 달콤한 아이스크림 한 덩어리에 쓰고 진한 갓 내린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부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제가 체크카드로 계산할게요.”

“응 그래~”

진희 아줌마네 카페가 처음 개업했을 때 우리 식구들도 전부 축하하러 왔다. 엄마 아빠는 개업 축하 글씨가 크게 쓰여있는 형광색 리본을 묶은 대형 몬스테라 화분을 선물했고 아줌마는 기뻐하며 커피와 개업떡을 대접했다.

“진희 엄마, 떡은 잘 먹을게요. 근데 커피값은 내야지요. 우리 식구가 개시할게요. 가까운 사람한테도 꼭 커피값은 챙겨 받아요. 알았죠?”

진희 아줌마와 스무 살은 차이가 나는 우리 엄마는 늘 혼자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진희 아줌마를 걱정했다.

“너희들도 나중에 여기서 마실 때는 꼭 계산하고 먹어야 한다. 알겠니?” 엄마는 나와 언니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어떤 때는 아지트에서 먹고 마시라고 통장에 돈을 더 채워주기도 했다.

아줌마가 내준 에스프레소를 아이스크림에 살살 부어 아포가토를 만들어 숟가락으로 푹 퍼 입안에 넣고 혀로 굴려가며 맛을 음미했다. 커피만 먹으면 쓰기만 해서 맛을 잘 모르겠는데 아이스크림이랑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아 맛있어.

“아줌마, 아이스크림 바꾸셨어요? 더 맛있어졌어요.”

“역시 연우는 바로 알아차리는구나. 응 새로운 아이스크림이야. 비건이라길래 한 번 사봤지. 괜찮아? 마음에 들어?”

“네 맛이 깔끔해서 좋아요.”

“연우야 한 한 시간쯤 더 있으면 진희 올 텐데 기다릴래?”

“네 그럴게요.”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진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지트에서 기다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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