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
연우는 남자애들처럼 놀았다.
그게 어떤 거냐면 이런 거다.
나랑 다른 여자애들이 드레스 입고 남자애들이랑 공주놀이를 할 때 연우는 보자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공주! 거기서 기다리시오! 정글 늪지대를 지나 내가 구하러 가겠소!' 소리소리 지르며 땅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여자애들이 서있는 곳으로 왔다. 그런 연우를 여자애들도 남자애들도 당황스러워했다. 기사인 여자애라니. 다른 애들이 연우의 놀이를 받아주지 않고 모른척해도 연우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런 연우가 재미있었다. 바닥을 기어 오는 연우 기사를 나는 킥킥거리며 '그래~ 나를 구해봐라 연우기사'라며 맞이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죽이 맞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연우는,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이 많은 언니들 덕에 아는 것도 많았고, 운동도 잘하고, 털털하고 성격은 시원시원해서 어른이고 아이고 다 연우를 좋아했다. 어린이집부터 친구였던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5학년 여름쯤 애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애한테 고백하는 유행이 돌았다. 코로나 시절이라 마스크 착용이 필수였는데, 편의점에서 파는 아이돌 굿즈 마스크를 사서 좋아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써서 선물하는 거였다. 보통 마스크와 다르게 굿즈 마스크는 색도 예쁘고 가끔은 귀여운 패턴이 찍혀있기도 했다. 고백받은 애가 고백한 애의 마음을 수락한다면 다음날 그 마스크를 착용하고 아니라면 마스크는 영영 세상 빛을 못 보게 되는 거였다. 우리 학년 남자애들 중 아이들 연우를 좋아했다. 그중 몇 명은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애들이었다. 그 애들의 마스크 고백이 연우의 책상에 도착했다. 여자애들은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연우의 표정을 살폈다. 정작 연우는 마스크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어? 분홍색이네? 난 분홍색 안 어울리는데, 응? 이 하트 패턴은 뭐냐! 너~무 예뻐서 나한테는 안 어울리네 ㅋㅋㅋㅋㅋ 하며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어떨 때는 그 자리에서 마스크를 나눠주기도 하고, 미처 그러지 못한 건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그런 연우의 태도가 좀 불안하고 못마땅했다. 고백한 애들이 얼마나 무안할까, 혹시라도 연우한테 앙심이라도 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다음 날이면 남자애들은 다시 연우랑 농구도 하고 축구도하고 게임 얘기도 하면서 이전처럼 지냈다.
어느 날 나는 연우에게 물었다.
"야 너는 왜 남자애들 고백을 그렇게 무시하냐."
"그거야… 웃기잖아. 무슨 고백인데 그게."
"그야 너 좋아한다는 거잖아."
"나는 그게 참 이상해.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면 받는 사람은 다 수락해야 하는 거야? 뭔가 좀 그래. 나라면 그렇게 안 해. 부탁을 할 거야. 나랑 친하게 지낼래? 내 단짝이 되어줄래? 이렇게. 부탁은 거절할 수도 있잖아. 근데 고백은 뭐야. 거절하기 어렵잖아. 마음을 고백했는데 거절했다? 뭔가 거절한 사람이 되게 잘못하는 것 같고… 암튼 이상해."
연우 말에 고개가 갸웃했지만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그래 고백이라는 거 받는 사람 입장은 하나도 생각을 안 하는 거지. 그랬네.
연우는 천방지축 놀기만 하는 애 같은데 저렇게 말할 때 보면 나랑은 다른 수준의 애 같았다. 책도 잘 안 읽으면서 어디서 저런 걸 배워오는 거지?
작년 늦가을 이제 중학생쯤 되었으니 집에서 제법 먼 홍대 쪽에서 놀아보자며 우리 반 애들 몇 명과 지하철을 타고 유명한 떡볶이 집에 찾아갔다. 떡볶이는 기대에 못 미쳤고, 홍대 앞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시끄럽고 지저분했다. 조용한 동네에서 평생을 지내다가 번화한 곳에 오니 반쯤은 넋이 나갔던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탄 지하철은 퇴근시간이 지나서인지 조금 한산했다. 약간 피곤하기도 하고 번화한 홍대 앞에서 어른의 경험을 한 것 같은 센티함도 있어 나는 애들 무리와 떨어져 열차 객실 반대쪽에 혼자 자리를 잡았다. 빈자리에 앉자 따끈한 바람 때문인지 번잡한 나들이 때문인지 잠이 들었다. 격렬하게 고개를 떨어뜨리며 졸고 있는데 허벅지 안쪽으로 기분 나쁜 움직임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느껴지는 순간 온몸이 긴장과 두려움으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눈을 떠도 될까? 이미 잠은 달아났는데 눈을 뜰 수 없었다. 몸을 움직여볼까. 잠든척하며 몸을 '꿈틀'하고 뒤척였다. 조느라 왼쪽으로 기울어졌던 몸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불쾌한 허벅지를 홱 끌어당겼다. 움직임은 잠시 멈췄다가 내가 조용해지자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두려움과 긴장으로 뱃속부터 떨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야~ 찐찐!! 그만 좀 자라!!"
누군가의 시끄러운 소리에 꿈틀거림이 멈췄다. 다음순간 연우가 내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야이 정신없는 잠탱아. 얼른 내리자. 우리 이번 역에 내려야지."
내 손을 잡아끄는 연우에게 끌려 나는 휘청거리며 열차에서 내렸다. 연우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마주 보이는 벤치에 앉혔다.
"찐찐. 숨 좀 쉬어봐. 좀 앉았다 가자."
연우에 그 말에 나는 울음이 터졌다. 옆에 앉은 연우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겨우겨우 울음을 추스르고 입을 뗐다.
"다른 애들은?"
"아까 그 차 타고 갔지. 벌써 도착했겠지 뭐. 넌 좀 어때?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겠지만…"
연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을 멈추고도 한참을 승강장 벤치에 앉아 연우 손을 꼭 잡고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차차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어때, 다시 전철 타고 가볼래? 움직일 수 있겠어?"
"응"
아무것도 묻지 않는 연우가 고맙고 따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