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두근거림
첫 월경을 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배가 묵직하고 불쾌하게 아팠다. 아침에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고 휴지로 닦았을 때, 그리고 휴지에 묻은 흔적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소년시절'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교육도 잘 받았고, 진희네 아줌마가 진희와 나를 앉혀놓고 매년 두어 번씩은 몸, 월경, 자위에 대해 얘기해 준 터라 첫 월경이 놀랍지 않았다. 그저 더 이상 소년이 아닌 것이 당황스럽고, 이제는 ‘여자’라는 바꿀 수 없는 사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럼 나도 임신할 수 있는 건가? 이상하다. 엄마인 내 모습, 성인 여자인 내 모습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뭐가 될까? 모르겠다.
언니를 처음 만난 건 스우파 팬카페 청소년 모임에서였다.
그 모임이 나에게 특별했던 이유가 있었다. 나처럼 짧은 머리, 그렇게까지 여성스럽지 않은 옷차림의 청소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힙합댄스, 비보잉, 팝핀 등등 스트릿 댄스를 추면서 기술 자랑도 하고 어떤 애들은 댄스크루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 크루가 참여하는 댄스배틀에 초대하기도 했다. 여자 댄스 크루들이었는데 그렇게 씩씩하고 멋진 여자애들은 처음 봤다. 온라인에서만 만났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이상하게 따뜻하고 친밀한 기분이 되었다. 학교나 동네에서는 늘 물 위의 기름 같은 느낌이었는데, 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 같았는데, 이 모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내 짧은 머리도 무채색의 옷차림도 소녀도 아닌 소년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그 바깥 어디쯤에 있는 내 정체도 불편하지 않았다. 생긴 그대로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대안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대안학교라면 뭔가 낙오자 같은 애들이나 가는데인 줄 알았는데 저렇게 멋져 보이는 언니가 다니는 학교라니 내 생각은 오해였나 보다.
언니는 페미니즘 어쩌고, 인권 어쩌고 하는 책을 들고 다녔다. 스마트폰 대신 폴더폰을 썼다. 옷차림도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 옷은 어디서 사는 거냐 물었더니 황학동 구제시장에서 산다고, 가끔은 중고물건들이 있는 아름다운 가게에서 사기도 한다고 했다. 인도풍인지 남미풍인지 힙합이나 스트릿 댄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라 처음에는 좀 분위기 파악 못하는 이상한 사람인가 오해하기도 했다. 피어싱도 양쪽 귀에 대여섯 개씩, 입술과 코에도 하나둘씩 있었다. 세상에. 청소년 맞아? 정아 같은 애가 봤다면 언니에 대해 벌써 뒷담을 했겠지.
언니집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았다. 모임이 끝나고 같이 버스를 타곤 했다. 어느 날 한산한 버스 안 좌석 두 개가 있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언니는 공기가 답답하다며 창쪽에 앉은 내 몸 위로 손을 쭉 뻗어 창문을 열었다. 언니한테서 레몬향이 났다. 나도 모르게 코로 향을 들이마셨다. 무거워졌던 마음에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언니는 이번 토요일에 뭘 할 거냐고 물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마을 축제를 여는데 놀러 오겠냐고 했다. 언니랑 모임의 몇 명들이 공연도 할 거라고. 토요일에 뭐가 있던가? 있어도 없어야지. 가고 싶다. 나는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마을축제는 소박했다. 좁은 골목이 매력적인 주택가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이곳저곳에서 작은 공연들이 있어졌다. 음식을 팔기도 하고, 동네 아이들이 쓰던 장난감을 들고 나와 팔기도 했다. 아기자기했다.
이 동네에는 언니랑 비슷한 스타일의 청소년들이 많았다. 여기서는 저런 스타일이 특별한 게 아니구나. 언니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다들 이름이 아닌 별칭을 썼다. 하늘, 여름, 연두, 새싹 등등. 나에게도 별칭이 있냐고 물었다. 진희가 나를 부르는 누누가 생각났다. 누누. 나를 누누라고 부르는 사람이 찐이말고 있어도 될까? 찐이한테 물어봐야 하나 잠깐 생각했다. 근데 뭐 내 별칭인데 뭐. 내 마음이지.
축제는 언니의 춤공연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언니 멋있었어요."
"언니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이름 불러. 말도 편하게 하고."
"네 언… 아니 응 지호야."
지호는 나이가 만드는 위계가 불편하다고 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지호… 이름을 부르니 내가 엄청 성숙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이후 지호만 보면 배가 아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배가 아니라 가슴과 배 사이 그 언저리가 찌르르하면서 두근거렸다. 기분도 이상했다. 어떤 때는 사타구니 근처에 심장이 있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아 씨. 이게 뭐야. 변태인가. 이런 내 반응이 반갑지 않았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건 너무 낯선 것이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지호를 좋아하나? 이런 게 좋아하는 감정인가? 자위할 때 지호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랬다가 나 자신이 너무 더럽게 느껴져 평소에는 하지 않는 기도를 하기도 했다. 반성의 기도를. 지호를 대하는 게 불편해졌다.
카톡도 페메도 쓰지 않는 지호와 연락하려면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야 했다. 나는 맨날 문자를 보내려다가 말고, 전화를 걸려다가 말았다.
어느 날 지호한테 문자가 왔다.
'학교 앞으로 가겠음'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데 지호가 서 있었다.
지호와 아는척하는 나에게 진희가 누구냐고 물었다.
"아 그냥 아는 사람."
내 대답에 진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 말이 안 되지 진희가 아는 사람이면 내가 아는 사람이고, 내가 아는 사람이면 진희가 아는 사람인데. 진희야 미안. 아직은 말 못 하겠어.
우리는 사람이 많은 롯데리아로 들어갔다. 지호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새우버거 하나씩 하고 콜라 한 잔을 사서 한쪽구석에 앉았다.
"너 요즘 왜 그래? 나한테 삐졌어?"
아닌데. 그게 아닌데. 오히려 반대야. 난 지호한테 반했다.
"내가 뭐 잘못했어? 나한테 말해야 내가 알지."
아니야. 너는 잘못한 게 없지. 내가 문제야. 좋아한다고 말해볼까? 그래도 될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 얘기를 누구랑 할 수 있을까?
진희한테 얘기하면 어떨까? 진희는 내 불알친구니까… 잘 들어줄까? 깜짝 놀랄까? 만약 진희가 내 얘기를, 내가 지호를, 언니를, 여자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싫어할까? 기뻐할까?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진희의 그런 반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연우야. 나는 니가 좋아."
응? 나를 좋아한다고?
지호는 말을 이어갔다. 지난 며칠 내가 이상해서 영 마음이 쓰였다고 했다. 연락 없는 며칠 내가 보고 싶고 궁금했다고.
"지호야. 나는 여잔데? 내가 좋아?"
불쑥 나온 말이 이거라니.
상관없다고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 성별이 무슨 상관이냐고. 자기는 바이섹슈얼이라고 했다.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머릿속이 멍했다. 이게 말이 된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게?
"연우야. 지금 당장 대답 안 해도 돼. 니 마음 어떤지. 시간이 필요하면 그렇게 해. 나는 기다릴 수 있어."
"근데 내가 왜 좋아?"
그래 내가 왜 좋아? 지호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뻐. 넌 내가 본 레즈비언 부치중에 제일 예쁜 애야."
이건 또 뭔 소리야. 지호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레즈비언?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부치는 또 뭐야.
"나 머릿속이 복잡해. 집에 가고 싶어."
지호에게 말하고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문자 보내!"
롯데리아 유리문을 붙든 지호가 내 뒤통수에 대고 소리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