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디자이너 라니씨가 추천하는 11월의 산책코스
오늘은 11월의 마지막날이고 마지막 목요일이기도 하며 올 해의 마지막 가을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겨울의 시작을 알리려는 신호인지 오늘의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다. 최저 기온 영하 7도에 낮 최고 기온도 0 도까지밖에 오르지 않는 올해 들어 제일 추운 날씨가 되리라고 했다.
지난밤까지 모임공지방에는 오늘 나오겠다는 친구들이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아서 날씨 춥다니까 못 오나 보다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휴대폰을 열어보니 계속해서 참가자 이름들이 주르륵 뜬다. 모두 열여섯 명이다!? 이 용감한 친구들이 예상을 뒤엎는 일을 자주 벌인다니까!
과천 서울대공원에 가려고 대공원역 3번 출구에 모였다. 겁을 잔뜩 주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겁먹지 않고 단단히 싸매고 두툼하게 입고 나왔다.
날씨는 맑고 차갑지만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는다.
과천의 대공원에는 왜 서울대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다(하기는 독일의 뮌헨에도 영국 공원이라는 공원이 있기는 하다).
여하튼 과천서울대공원에는 동물원, 식물원, 놀이공원, 테마정원, 캠핑장 등 가볼 곳이 많지만 그 외에도 산책할 수 있는 길이 많다. 옆에는 현대미술관도 있고.
잘 알려진 대표적 산책로는 산림욕장길과 동물원둘레길이 있다.
산림욕장길은 동물원을 둘러싼 청계산 능선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길로 숲길도 좋고 전망도 좋은 길이지만 오르막내리막길이 많아서 이제 막 등산을 시작하려는 초보등산객들에게는 잘 맞을 것 같다. 우리도 초반에는 산림욕장길을 시도해 보다가 포기하고 동물원둘레길이 적당해 보여 이 길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동물원둘레길은 원래 동물원 안에서 관리용 차량들이 다니던 길이어서 우선 동물원 매표소에서 매표하고 입장해야 비로소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동물원을 통과하지 않고도 외부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완전히 개방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동물원 입구까지 가려면 역에서 나와 예전의 분수광장을 지나 도보로 30분쯤 걸어야 한다. 걷기를 꺼리는 어린아이들이 있다면 코끼리 열차도 있지만.
오늘 우리는 자주 가는 광장 쪽 길로 곧장 가지 않고 3번 출구에서 나오면 보이는 대형 주차장 옆을 크게 돌아서 청계산 방향으로 간다. 이 길은 근처에 사는 한 친구가 새로 발견했다는 처음 가보는 길이다.
길 이름은 막계로, 걷다 보니 청계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도 보인다. 왼쪽 아래로는 리프트 승차장이 보이고 좀 더 가니 우리가 전에 걷던 호숫가 숲길도 보인다. 곧 동물원둘레길 입구가 나타나고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둘레길을 완주하려면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한 바퀴 돌고 미술관앞쪽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앞으로 두 시간 이상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추운 날씨에 무리가 되지 않을까 해서 오늘은 좀 더 짧게 반대편 미술관 쪽 입구에서 들어가다가 돌아 나오기로 한다.
이 길은 소나무숲길로 빽빽이 서있는 소나무들이 아직 연갈색 단풍잎이 매달린 활엽수들과 어울려 쓸쓸하지 않고 은은하게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랗다. 동물원 울타리 너머로 식물원이 보이는 곳까지 가다가 발길을 돌린다. 날씨가 좋으면 도중에 벤치에 앉아서 도시락도 먹고 천천히 둘레길전체를 걸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우선 가까운 따뜻한 곳에서 쉬어가는 게 좋겠다.
현대미술관에는 전망 좋은 카페 겸 식당이 있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메뉴가 있으니 각자 취향대로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점심 후에는 미술관의 옥상정원에도 올라가 본다. 작년 이맘때 왔을 때는 눈이 와서 눈을 맞으며 즐거워했는데 올해는 날씨가 맑아서 작년에 볼 수 없었던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난다. 가까이에 청계산과 건너편에 관악산과 과천 시내가 한눈에 다 보인다. 하늘은 어찌 그리 파란지 무어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사파이어 블루? 터키 블루? 쪽빛? 같다고 해야 하나? 어휘가 부족함이 새삼 실감된다.
옥상정원에서 나선형으로 된 통로를 내려오는데 마침 백남준 선생의 작품인 비디오 타워 “다다익선”이 다시 가동되며 천 개가 넘는(1003개라고 함) 모든 비디오에 전부 불이 켜지기 시작하여 번쩍거리며 관객의 시선을 끈다.
미술관에서 나와 호숫가둘레길로 들어선다. 여기서 또 한 번 산과 호수와 호수에 비치는 푸른 하늘이 연출하는 경치에 감탄한다. 오늘은 정말 늦가을의 마지막 풍경을 실컷 즐기고 간다.
그런데 미술관의 점심이 좀 부실했는지 후식이 좀 미진했는지 굳이 할매집 부추전을 먹고 가겠다고 일부 친구들은 역 바로 앞에서 옆길로 빠진다. 아주 먼 옛날 중고생 시절 방과 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 떡볶이 먹고 가겠다고 학교 아래 있던 문방구로 몰려들어가던 여학생들이 잠시 눈에 어른거린다.
오늘 우리는 짧은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거의 16000 보 걸었다.
2023년 1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