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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Dec 29. 2023

겨울의 서울숲

산책 디자이너 라니씨가 추천하는 12월의 산책코스

최저기온 영하 14도, 낮 최고기온 영하 7도, 동지 하루 전날 오늘의  날씨이다. 올겨울 들어 제일 추운 날씨라고 한다.

이런 추위에 누가 걸으러 나올까? 했더니 자칭 용감한 할머니들이 열세 명이나 서울숲 역 대합실에 모였다. 모두들 두툼하게 챙겨 입고 싸매고 나와서 하는 말이 이런 날 노인이 외출한다면  아이들한테 야단맞을 테니 어디 간다고 말도 못 하고 나왔단다.


이런 추위에도 모이면 만나자마자 자연스럽게 모두들 하는 옛날이야기들이 있다. 옛날에, 즉 60년 전 겨울에는 얼마나 추웠는지, 그때는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외투도 못 입고 학교에 다녔고, 운동장에서 열린 조회 시간에는 얼마나 손발이 시렸는지, 또 집에서는 온돌방이었지만 아랫목만 뜨겁고 윗목 창호지 문 앞 머리맡에 놓아둔 물그릇의 물은 밤새 얼기도 했다는 등등 이야기가 끝이 없다.


어쨌든 너무 추워서 걸을 수 없다면 실내로 들어가거나 다른 길을 찾아야겠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란 하늘 때문인지  마주 불어오는 북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군소리 없이 걷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틀 전에 내린 눈이 많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아직 녹지 않고 길옆과 나무둥지 아래에 하얗게 덮여 있어 바라던 눈 쌓인 겨울 풍경이 나타난다. 얼어붙은 호수는 갈대 사이에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고. 겨울에는 역시 눈이 와야 겨울답다고 생각하며 눈도 내리지 않고 어둡고 음산한 독일의 한 도시에서 어느 겨울을 보내며 눈 덮인 서울의 산들을 그리워했던 때가 기억난다. 또 한때는 눈 많이 오는 독일 남부 도시에  살면서 눈 내리는 것을 생전 처음 본 태국 여학생들이 눈을 맞으며 신기해하며  좋아라고 기숙사 뒷마당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눈 오는 우리나라의 겨울이 자랑스러웠던 기억도 나고. 요즘은 동남아 지역에서 눈 구경을 하러 한국에 온다는 많은 관광객들이 이해된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눈 온다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고 눈길을 걷다 미끄러지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서울숲의 산책로에는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어 편안히 걸을 수 있다.

오늘은 호수를 돌고 나서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줄기만 빽빽하게 사진 속 풍경처럼 서있는 은행나무길을 통과하여 습지생태원까지 갔다가 습지원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사과나무길 앞쪽까지 와서 그 건너편의 곤충식물원으로 간다. 날씨가 너무 추우니 야외 벤치에 앉아서 쉬어갈 수는 없고 곤충식물원 안에 들어가서 잠깐 몸을 녹이고 가기로 한다.

곤충식물원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그 안에 들어가니 바깥과는 딴 세상으로 따뜻한 공기가 너무 반갑다. 아열대의 키 큰 나무들과 여러 가지 꽃들이 잘 자라서 볼만하고 다양한 곤충들과 또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수족관들도 갖춰져 있다. 거북이까지 살고 있다. 처음에는 그 거북이가 꼼짝 않고 있어 박제된 것이 아닌가 했더니 주변이 시끄러워서인지 고개를 돌리며 조금씩 이동도 한다. 곤충식물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얼었던 몸이 좀 녹기 시작한다. 얼었던 손가락이 녹아서  사진을 찍어  보려 하나 렌즈에 김이 서려 뿌옇게 되어 환상적인  분위기만 자아낼뿐이다.  곤충식물원 옆에는 나비정원 입구라는 표시가 있지만 오늘은 휴관이라고 한다.

이제 공원을 나와 큰길로 나가서 역 앞의 밥집으로 들어간다. 예상보다 작은 식당이어서 나중에 합석한 친구까지 열네 명이 겨우 꼭 끼어 앉는다. 따뜻하게 점심을 먹고는 곧 옆 건물에 있는 커피집으로 가서 마침 비어있는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그런데 그때  이 근처에 사는 한 친구가 깜짝 등장을 한다. 그것도 산타할아버지처럼 선물을 한 보따리 들고 말이다. 이 친구는 가끔 목은산모임이 산행을 끝내고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갈 때만 함께 참여하기도 하므로 목은산회 ‘점심회원’이라고도 불리는 친구이다.  요즘 총동창회를 맡아 수고하고 있으므로 바쁜 일이  많을 텐데도  친구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추위를 무릅쓰고 나와서 여간 고맙지 않다. 내일모레가 크리스마스이브이므로 친구들은 제때에 뜻밖의 크리스마스선물을 받고  어린아이들처럼 들떠서 기뻐하며 어쩔 줄 모른다. 덕분에 캐럴만 안 불렀지 크리스마스 파티 한번 제대로 했다.


올겨울 들어 제일 춥다는 날이었어도 오늘 목은산 친구들은  만보 이상 걸었다.


이 강추위에 손이 시려도 열심히 사진을 찍은 친구가  앨범으로 만들어서 단체방에 올린  사진들은 집에서 궁금해하며 기다리다가 휴대폰으로  관람하는 친구들에게 또다시 칭찬을 받는다.


미국에 사는 한 친구는 휴대폰사진을  TV의 큰 화면이나 컴퓨터에 연결하여 보면서 고향의 경치 감상도 하고 반가운 옛 친구들도 만난다고 한다.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2023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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