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날 아침이다. 창문을 열어 보니 아카시아 꽃향기가 바람결에 묻어 들어온다. 아니 벌써 아카시아 꽃이 피었나? 5월 말쯤 피는 줄 알았는데.. 집 앞 매봉산 자락의 아카시아 숲이 하얀 꽃으로 부드럽게 덮여 있다. 예년보다 더 무성하진 것 같다. 오늘 우리가 산행할 봉산 편백나무숲에도 아카시아꽃이 피어 있겠지?
6호선 새절역 3번 출구에서 열한 명이 만난다.
새절역은 은평구 신사동新寺洞에 있으므로 신사역이라고 지하철 역이름을 정하려 했으나 강남의 압구정동 옆에 이미 신사역新沙驛이 있어 혼동을 피하려고 원래 우리말로 새절역이라고 했단다. 이 동네 근처에 새절이 있어서 오래전부터(영조 때에도) 신사동이라고 불러왔던 모양이나 그 새절이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지명만 남아있다.
새절역에서 마을버스 10번을 타고 숭실고등학교까지 간다. 걸어가도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오르막길이고 그늘도 없어 버스 타기를 잘한 것 같다. 버스 종점에서 5분쯤 올라가니 “봉산 편백나무 힐링숲”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요새 사람들은 “힐링"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지난주에 갔던 불암산 “힐링타운”도 그렇고.) 여기서 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무장애숲길이 시작된다.
원래 봉산 능선길은 서울둘레길 7코스의 은평구간으로 앵봉산, 구파발역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몇 년 전에 우리도 봉산-앵봉산 코스의 일부 구간을 걸어본 적이 있으나 (그전에는 봉산의 팥배나무숲이 유명하다고 했다), 작년에 이 둘레길 옆에 조성된 편백나무숲으로 가는 무장애 데크길이 완공되었다고 하여 궁금했었다. 이 데크길로는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닐 수 있고 우리 같은 보행약자들도 편안하게 걸어서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요즘 동네의 뒷산마다 이런 무장애데크길이 유행처럼 많이 만들어져 시민들의 걷기를 장려하고 있다.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데크길이 지루하다 싶으면 옆으로 보이는 지름길인 원래 둘레길의 흙을 밟으며 걸어갈 수도 있다.
편백나무는 원래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만 자라던 나무이지만 10여 년 전부터 서울 근처에도 심기 시작했는데 유독 이곳 봉산에서만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한때 삼림욕이 건강에 좋다고 붐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특히 편백나무잎에서 내뿜는 피톤치드가 항암치료에 효능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때 항암치료를 받고 있던 한 친구를 위해 전남 장성까지 가서 편백나무숲을 찾아 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멀리 가야 볼 수 있는 편백나무숲을 서울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오늘 우리가 그 숲길을 걸을 수도 있다니 운이 좋은 날이다. 편백나무숲 그늘에서 피톤치드 향을 흠뻑 들이마시고 아카시아꽃 향기가 실린 봄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심신이 맑아지고 상쾌해진다.
봉산 편백숲 무장애길이 벌써 소문이 났는지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이 꽤 많다. 그래도 전망대 가까운 곳에 있는 편백정이라는 정자는 비어 있고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내준다. 여기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화장실도 가까이에 있어 다행이다.
편백정에서 간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며 한숨 돌리고 다시 편백숲 전망대를 향하여 걷는다. 전망대에서 보는 경치가 과연 기가 막히다. 북한산에서부터 인왕산, 백련산, 안산, 멀리 남산까지 파노라마를 이루며 시원하게 한눈에 다 보인다. 그 여러 산 아래 계곡에 빽빽이 들어찬 고층아파트의 숲이 가슴을 좀 답답하게 하지만 먼산의 능선들이 이루는 곡선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둘레길은 봉수대가 있는 정상(209 미터)을 지나서 수국사라는 절까지 계속 이어지지만 무장애길은 거기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오늘 수국사까지 가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우리는 정상까지 가지 않고 무장애 데크길이 끝나는 곳까지만 갔다가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다음에는 반대편 수국사 쪽에서 올라와 편백숲을 걸어 봐야겠다.
내려갈 때는 데크길과 흙길을 번갈아 가며 걸어 내려가서 다시 숭실고등학교 앞에 이른다.
이제 점심 식당을 찾아갈 시간이다. 한 친구가 전날 인터넷에서 검색했다면서 식당 한 곳을 제안한다. 가는 길을 찾아보니 숭실고에서 걸어서 20 분 정도 걸리겠다. 그 정도야, 하며 쉽게 생각하고 걷는데 쉽지가 않다. 지도상에서는 직선거리이지만 평지가 아니고 실제로는 언덕을 넘어야 하는 길이다. 신사동고개라고 한다. 이 고개를 넘고 은평로에 있는 언덕을 또 하나 넘어 겨우 찾던 식당에 이른다. 봉산 자락에 고개가 많은 것을 보고 서울에는 역시 산이 많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며, 두 군데 고개를 넘느라고 다들 지쳐갈 때쯤 식당을 발견하니 여간 반갑지 않다. 이 식당은 돼지갈빗집으로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편인데 게다가 “70세 어르신쌈밥"이라는 점심특선 특별할인 메뉴(만 원짜리)도 있어 모두 환호성을 지른다(인심이 좋은 동네다!). 활짝 핀 이팝나무꽃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밝은 식당이 분위기도 좋다.
푸짐한 쌈밥을 먹고 카페를 찾아 가는데 아무리 고개 넘어 낯선 동네에 가더라도 낯익은 이름의 카페는 금방 눈에 띄기 마련이다.
오늘은 한 친구가 자신의 생일임을 고백하고 다른 친구들을 후식에 초대하여 케이크까지 자르며 생일잔치를 열고 축하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오늘의 시작은 새절역에서 했으나 끝맺음은 응암역에서 한다. 인터넷 덕분에 가보지 않아 모르는 동네에 가서도 헤매지 않고 잘 찾아다녔다. 우리는 참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오늘도 무사히 만이천 보 걸었다.
2024년 5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