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그늘도 없는 구리 한강변 둑길을 걷느라고 노인들이 땀깨나 흘렸고 힘도 들었으니 이번주에는 어디서 시원하게 걸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냉방시설이 잘 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떠올랐다.
마침 우리가 몇 주전에 다녀왔던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을 기획하고 설계한 정영선 조경가의 전시회가 아직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가 이미 몇 차례 다녀왔던 한강의 선유도 공원도 그 조경가의 작품이라고 하여 그 외에도 또 어떤 다른 작품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Flag=1&exhId=202401150001735
전시회에 간다고 공지하니 열두 명이 참가하겠다고 모인다.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광화문 쪽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탁 트인 열린송현광장이 보인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대사관 숙소 터여서 오랫동안 높은 담으로 가려져 있던 곳인데 이제 서울시에 반환되어 답답하게 가리고 있던 담장이 철거되고 넓은 녹지광장으로 변해있다. 이 광장은 지금 잔디와 꽃밭이 조성되어 북악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여기서 야외 조각전이 열리고 있는데 해가 질 무렵에 와 보면 좋을 것 같다.
송현광장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돌면 서울 공예박물관이 있다. 이 공예박물관은 코로나 시절이었던 3년 전에 개관하였지만 나도 처음이고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친구들이 많아서 우선 여기부터 들려 보기로 한다. 그동안 가끔 이 근처를 지날 때면 박물관의 원통형 색동 건물이 예뻐서 궁금했지만 탐방할 기회를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예박물관은 예전에 풍문여고가 있던 자리에 세워져 있다.
상설 전시실에는 한국공예의 전통과 역사를 볼 수 있는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라는 주제로, 또 다른 전시실에서는 “자수, 꽃이 피다"와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한 땀 한 땀 수놓아진 아름다운 자수 병풍이나 함을 보면서 이름 없이 작품만 남기고 간 여성예술가들이 대다수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공예박물관에서는 상설전시뿐만 아니라 특별 기획전시회도 열리는데 오늘은 한국-오스트리아의 현대 장신구 교류전이 “장식 너머 발언”이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재료가 독특한 아이디어에 의해 현대적인 새로운 장신구로 만들어진 것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시품도 전시품이지만 한 전시실에서 다른 전시실로 이동할 때 복도에서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도 액자 속 풍경화 같이 일품이다. 한쪽 창으로는 율곡로와 광화문 일대의 번쩍거리는 현대도시가 보이는가 하면, 다른 쪽 창밖으로는 나지막하게 오래된 한옥 기와지붕들이 보여서 내가 북촌에 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밖에서 본 원통형 색동 건물은 어린이박물관이라고 하는데 아쉽지만 오늘은 들어가 볼 시간이 없다.
공예박물관을 나와서 오른편으로 감고당길(율곡로 3길)을 따라 걸어가니 덕성여중고가 양편으로 서 있다. 예전에 이 근처에 많았던 중고등학교가 대부분 서울의 강남으로 이전해서 이제는 강북에서 볼 수가 없는데 오늘 오래된 학교 이름이 박힌 교문을 여기서 다시 보니 반갑다.
북촌의 화동 정독도서관(여기는 옛 경기고교가 있던 자리다) 앞 사거리까지 가기 전에 왼쪽 골목 사이로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이 보여서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골목에서 나오니 복원된 종친부(조선시대 왕실 종친들에 관한 사무를 보던 곳) 건물이 나타나고 곧 현대미술관 뒤편이 보인다. 이곳은 소격동이라 하고 맞은편에는 경복궁이 있다.
현대미술관 출입구를 찾아 들어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받아 오늘의 원래 목적지인 조경 전시장으로 향한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평생을 바쳐 공원과 숲을 만들어낸 정영선 조경가의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장이다.
전시장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넓은 벽면과 바닥까지 충분히 활용하여 공원 조성을 위한 많은 자료들, 스케치와 메모, 설계도면, 모형, 사진, 동영상이 골고루 배치되어 조경가의 50년의 업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공원의 역사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이제까지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찾아가서 좋아하며 걸었던 공원들이 그분의 작품이라니 놀랍고 또 그 수가 의외로 많아서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도심 속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공원을 통해 우리나라의 자연과 생태환경을 보전하려던 한 여성의 노력이 이렇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니 같은 여성으로서 매우 자랑스럽기도 하다.
전시장 앞의 중정에는 전시 계획의 일부로 꽃과 나무가 심긴 전시마당도 있어 이곳을 거닐어 볼 수도 있지만 뜨거운 햇볕 때문에 안에서만 내다 보고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예약된 점심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어 각자 자유시간을 갖고 다른 전시장도 둘러보고 식당에서 만나기로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공간도 넓고 천장이 높아 채광이 잘 되어 밝고 시원해서 전시회가 아니더라도 실내산책하기 아주 좋은 곳이다.
우리 같은 생각을 하고 온 사람들이 많은지 관람객이 꽤 많다. 여름방학이 가까우니 학생들과 관광객들이 더 많아질 것 같다.
미술관 안에는 식당도 있어 점심도 여기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옆의 카페는 만원이어서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안국역 쪽으로 가다가 적당한 카페를 발견하여 여기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안국역에서 헤어진다.
오늘은 땀 많이 안 흘리고 만보 걸었다.
2024년 6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