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고 동창회에서 가을 소풍 가는 날이다.
많은 친구들이 참여하는 특별한 소풍이니 전세버스를 타고 좀 멀리 가보려고 한다.
충청남도 공주로 가서 공산성을 비롯해서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돌아보고 오기로 했다.
아침 8시 20분에 양재역 2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대부분 친구들이 시간 전에 일찍 나와 기다리고 있고 빨간색 대형버스도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가을소풍이라고 설레는지 모두 들뜬 표정이다. 그런데 한 친구가 지각하는 바람에 출발시간이 좀 늦어진다.
분당이나 판교에서 출발하는 친구들을 동천역 환승센터에서 태우고 나니 모두 서른 명인데 한 명이 더 하동에서 공주로 직접 온다고 한다.
공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친구 Y가 앨범으로 만들어 USB에 담아 온 영상을 버스의 TV 화면으로 보여주는데 우리 모임이 지난 십일 년 동안 산행한 사진기록이다. 꽃 피는 봄부터 눈 내리는 겨울까지 우리들이 그동안 해마다 걸었던 길의 풍경들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십 년 전만 해도 우리가 많이 젊어 보이네?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다.
버스는 천안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드디어 공주시에 도착하여 공산성 입구 공영주차장에서 정차한다. 버스를 내려서 공산성 매표소로 가니 하동에서 온 친구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다. 하동에서부터 직접 승용차를 운전해서 왔다고 하니 대단한 친구다!
공산성 앞 연문광장 가운데에는 웅진 백제를 유명하게 만든 무령왕의 금빛 동상이 우뚝 서서 손짓하고 있다.
무령왕상 남쪽으로 공주의 구시가지가 보이는데 나지막한 건물들의 지붕이 고즈넉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광장에는 우리 외에 학생들 단체 관광객이 한 팀 더 온 것 같고 건너편 상가 쪽은 아직 조용하다.
우리는 학생 중 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공산성의 누각인 금서루를 멀리 뒷 배경으로 삼아 단체사진을 한 장 찍는다.
그리고 매표소를 지나서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를 향해 산성을 향해 올라간다. 올라가는 길옆에는 많은 비석들이 늘어서 있는데 부근 지역에 있던 송덕비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금서루 앞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보니 다시금 편안하고 평화로운 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누각의 문을 통과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공산정은 왼쪽으로 올라가라고 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니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공산정이라는 정자 앞에서는 공주시의 남북이 한눈에 보인다. 남쪽으로는 구시가지이고 북쪽으로는 금강철교 아래로 금강이 흐른다. 절벽 같은 산성 아래로 금강이 흐르고 있어 공산성이 북에서 내려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천연 요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겠다. 강건너에는 아파트들이 늘어선 신시가지가 보인다.
공산정은 지금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지 정자 위에는 올라가 볼 수가 없다. 공산정에서 동쪽 아래에 보이는 공복루까지는 성벽을 따라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성벽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면서 왼쪽 옆으로 힐끗힐끗 내려다보는 강변의 경치가 그림 같다. 유유히 흐르며 반짝이는 금강과 강변의 모래사장 그리고 멀리 산능선들이 부드럽게 펼쳐지며 서로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지금부터 113 년 전에 한국을 다녀간 독일인 베버 신부가 이 자리에 올라서서 해 저무는 강변 풍경을 보고 감탄하면서 한국인이 되어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 朝鮮”이라는 한국 기행문에서 썼던 구절이 기억난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오늘 이곳 경치를 보니 새삼 그 말에 공감하게 된다. 물론 당시에 산성의 성벽은 폐허가 되고 무너져서 성벽을 따라 길도 없는 길을 올라갔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길이 계단으로 깔끔하게 정비되고 야자매트까지 깔려 있어 그때보다는 훨씬 편하게 산성길을 오르내릴 수 있다.
성벽 위에는 길 따라 송산리 고분의 사신도 문양을 재현한 깃발들이 줄지어 펄럭이고 있다.
길 중간에는 수백 년 되어 보이는 고목 한 그루가 꿋꿋이 서서 강변을 내려다보며 우리를 멈추게 한다. 내리막길을 좀 더 내려가니 산성의 북쪽 누각 공북루에 이르고 그 앞에는 잔디로 덮인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웅진 백제 시대의 궁궐터였을 거라고 추측된다고 한다.
공북루에서 동쪽 오르막길로 올라 언덕에 이르니 저 아래쪽 강변에 만하루라는 누각과 사각형 모양의 연못 연지가 내려다보인다. 시간이 많으면 저곳도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고 계속 산성 둘레길을 오르내리며 완전히 한 바퀴 돌아보고 싶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아쉬움을 남긴 채 연지 남쪽에 있는 절 영은사 앞을 지나서 다시 공북루 쪽으로 돌아간다. 공북루 앞 빈터에 모여있는 일행들과 함께 우리가 출발했던 금서루로 다시 되돌아가서 공산성 산책을 마치고 예약된 식당으로 간다.
우리가 예약한 쌈밥집은 마침 공산성 입구에서 걸어갈 수 있는 식당가에 있어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식당에서는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에 정확히 맞추어서 솥밥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반찬을 벌써 차려 놓았다. 모두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오고 또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난 후여서 모두 점심을 맛있게 먹는다. 점심 후에는 식당 건너편에 있는 제과점에서 공주 특산물 밤으로 만들었다는 밤파이를 후식으로 나누려고 한 보따리 씩 사서 버스에 오른다.
점심 후에 갈 곳은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다.
무령왕릉은 원래의 무덤에는 들어갈 수 없고 무덤 옆에 실제 크기로 설치된 모형전시관에서 모형으로 무덤을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다.
두 시에 예약된 해설사와 만나서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듣는다. 해설사의 명료한 해설을 듣고 나니 백제의 무덤의 축조양식과 벽돌의 문양, 부장품등(모형이지만)을 통해 다시 한번 백제 문화의 진수, 섬세함과 정교함을 느끼게 된다. 다만 발굴당시의 현장을 재현했다는 진열장 안은 조명이 전혀 없이 너무 어두워서 뭐가 뭔지 보이지 않으니 좀 답답하다. 좁은 틈새로 희미한 빛이라도 들어오는 것처럼 연출했더라면 더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며 전시관을 나와 실제 왕릉들이 있는 언덕 사이를 걸어본다. 왕릉들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청명한 가을 하늘과 어울려 아주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기도 무척 맑다.
오늘 멀리 왔으나 시간이 금세 지나가니 오래 머무를 시간이 없다. 집으로 돌아갈 걱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해도 일찍 기울고 서울 가는 길 도로 사정이 어떤지 모르니까.
공주에 머무른 시간이 짧아 아쉽기는 했지만, 맑은 날씨, 편안한 버스, 아름다운 산책 코스, 맛있는 식당, 모두 좋다고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60여 년 전의 여고생들처럼 우리가 많이 웃고 깔깔댔다는 사실이다.
거의 예정시간에 맞게 양재역에 도착하니 날은 역시 어두워졌다. 모두 헤어져서 급히 퇴근길 인파에 쓸려 들어간다.
집에 돌아와서 부지런한 한 친구가 먼저 만들어 올린 오늘의 앨범사진에 각자 찍은 사진들을 차례로 추가하니 모두 400 장이 넘는다. 앞으로 두고두고 뒤적여 보며 미소 지을 사진들이다.
2024년 1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