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 중 한 친구의 어머니께서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여가수로 활동하신 이금봉 여사라고 한다. 그분은 이미 20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요즘 한국의 클래식 음악 발전과 그분에 관한 전시회가 서울시립대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고 하여 오늘은 목은산모임 친구들이 함께 관람하러 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서울시립대는 마침 배봉산 자락에 있어 배봉산둘레길을 돌아서 전시장으로 갈 수가 있다.
회기역 2번 출구에서 열두 명이 모였다. 이금봉 선생님의 따님인 경숙이가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역에서부터 함께 한다.
전철역 출구에서 나와 왼편으로 망우로를 따라 중랑교 방향으로 가다가 중랑천에 거의 가까이 가면 오른편에 휘경 2동 주민센터가 있다. 주민센터 건너편으로 배봉산 둘레길 입구가 보인다.
배봉산은 조선시대에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이 있었던 곳으로 아드님인 정조가 이 산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해서 배봉산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또 이 산에는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유빈 박 씨의 묘소인 휘경원도 있었다고 하니(휘경원은 남양주로 옮겨갔고 휘경동이라는 동네 이름만 남았다) 우리는 오늘 역사적인 산에 온 것이다.
배봉산 둘레길은 처음부터 무장애데크길로 편안하게 시작한다. 도중에 전망대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있어 그리로 올라가니 운동시설과 함께 벤치가 디귿자로 놓여 있는 정자가 한채 서 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자를 보니 모두 앉아 보고 싶어 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 친구가 전시장 가기 전에 이금봉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미리 좀 들어 보자고 한다. 모두 좋다고 하며 경숙의 어머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80여 년 전 한국의 여성들이 아직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쪽진 머리로 다니던 시절에 서양 음악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셨다니 대단히 선구적이고 대담한 여성이셨다고 생각된다.
이금봉 어머니 이야기는 계속 듣고 싶지만 일정이 있으니 우선 앞머리만 조금 듣고 전시장에 가서 직접 보고 나머지 이야기를 듣기로 하고 산행을 계속한다.
배봉산의 정상 해맞이 광장으로 오르는 완만한 능선길은 가을색이 깊어진 낭만적인 숲길이다. 낙엽이 깔린 등산길 옆에는 따로 황톳길도 만들어 놓아 맨발로 걷는 사람들도 자주 보인다.
정상(108 미터)에 오르니 앞이 확 트인 광장이다. 동쪽의 용마산부터 롯데타워 그리고 남산의 서울타워까지 서울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그야말로 전망명소이다. 발굴 시기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삼국시대의 고구려 유적으로 추측되는 보루도 발굴했다고 한다.
전망 좋은 곳에서 단체로 기념사진도 찍고 산에서 내려가는 발길을 재촉한다. 박물관에서 학예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부터 시립대로 가는 길은 이정표가 정확하지 않아 여러 번 물어가며 내려간다. 다행히 배봉산 둘레길과 연결된 시립대 캠퍼스의 음악관 근처에 쉽게 이른다. 서울에 오래 살았으면서도 서울시립대에는 처음 와 보았는데 넓은 부지에 건물도 많고 규모가 아주 큰 대학이다. 이 대학의 명소인듯한 운치 있는 하늘못을 지나 정문으로 향하는 큰길에는 줄지어 선 은행나무가 때마침 황금빛으로 물들어 환하게 빛나고 있다. 그 아래로 걸어가는 학생들의 걸음이 매우 활기차 보인다. 정문 쪽으로 가다가 왼편으로 내려가니 박물관답게 고풍스러운 건물이 한채 나타난다. 전시관이다.
전시관 밖에는 “클래식 서울” 과 “140년의 아리아”라고 두 가지 전시회의 현수막이 붙어 있다. “클래식 서울” 에서는 해방 이후 서울의 클래식 음악의 발전사를 보여주는 공연장과 공연포스터, 그리고 당시에 활동하던 음악가들의 사진과 기록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공관이니 시민회관이니 오늘의 예술의 전당이나 국립극장이 있기 전에 가 보았던 옛 공연장 이름과 사진을 보니 반갑다. 지금은 세계적 음악가들이 된 연주자들의 어린 시절 또는 젊은 시절의 사진들을 가리키며 친구들은, 이 연주회에 갔었다, 저 연주회에 가 보았다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많은 자료의 상당수를 우리 친구 경숙이가 수집하고 보관하였다가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머니가 간직한 유품에서 시작했겠지만 말이다.
이금봉 어머니 전시코너에는 노래하는 음성이 녹음된 다큐 영상과 함께 여고시절 사진에서부터 소프라노 가수로서, 음악교사와 대학 강사로 한창 활약하시던 때의 사진들, 그리고 사용하시던 풍금과 오래된 전축도 전시되어 있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떤 친구는 여중 1학년 때 경숙이 어머니가 같은 반 교실에 오셔서 노래를 불러 주신 것이 기억난다고 한다.
어머니도 훌륭하셨지만 따님도 훌륭하다. 따님이 보관한 이 많은 자료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 이금봉 선생님을 알 수 있었을까? 한국 클래식 음악 역사에서 이금봉 선생님께서 다시금 빛을 보게 해 드린 서울시립대 박물관이 대단히 고맙다.
이어지는 또 다른 전시회는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 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전시회로 “140년의 아리아”라는 제목에서 벌써 오페라의 나라가 떠오른다. 19세기말 20세기초 한국에 근무했던 젊은 이탈리아 영사 로제티가 찍은 당시의 한국풍경 사진과 글과 함께 양국 교류 역사의 중요한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에서 두 가지 의미 있는 전시회를 관람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후에 시립대 정문을 나와서 친절한 박물관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근처의 식당으로 간다. 경숙은 우리를 전시회에 초대하고 안내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점심까지 초대했다.
훌륭한 어머니를 둔 훌륭한 따님 덕분에 딸의 친구 우리들은 오늘 배봉산도 걷고 유익한 전시회도 보고 심신이 건강해지는 감사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2024년 1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