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디자인에 고려할 요소

세 번째 이야기

by 지현
2011년 라니씨가 퇴직했다.
정년퇴직.
라니씨가 만 35세에 취업한 생애 두 번째 직장에서 꼬박 30년 하고도 한 학기를 보내고 퇴직을 했다.

라니씨는 영원히 마흔 언저리일 줄 알았다.
라니씨는 영원히 직장인일 줄 알았다.
그랬는데, 라니씨의 일하는 여성, 일하는 엄마의 삶이 일단락되었다.

퇴직 후 라니씨는 여고 동창생들의 산책 코스를 제안하는 ‘산책 디자이너’가 되었다.

이 글은 나밖에 모르던 딸인 내가 엄마 라니씨의 삶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며, 라니씨가 디자인한 산책 이야기, 그리고 라니씨의 엄친아(엄마 친구 아줌마들)의 이야기이다.

산책 디자이너 라니씨는 다음의 요소들을 고려해 산책 장소를 구상했다.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일 것

라니씨가 산책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만 65세가 지난 때였다. 그때 라니씨의 친구들은 거의 지공선녀(지하철 공짜로 타고 다니는 선녀. 남성형은 지공선사)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운전을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서로 다른 형편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도착할 수 있을 것

라니씨가 “버스 타고 우르르 움직이면 너무 시선을 끌게 될 수도 있으니까 되도록 지하철 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산책코스를 골라야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나는 좀 속이 상했다.

라니씨와 함께 걷는 엄친아들(엄마친구아줌마들)이 얼마나 그 존재만으로도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사람들로부터 ‘몰켜 다니는 할마씨들’ 취급을 당해야 하다니, 속상하고 화가 났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노인, 그것도 여성 노인에게 얼마나 각박한지 한 번 더 생각하게 했다.

그러면서 나의 여고시절이 떠올랐다. 아니 그 먼 시절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무리 지어 좀 소란스럽게 하는 여성 무리에 얼마나 무례한 시선과 언행이 따라오는지 생각해 보자. 나는 여러 번 봤다. 나이가 어리면 어리다고, 젊으면 젊다고, 중년이면 중년이라고, 나이가 많으면 많다고… 여성들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아 분해. 라니씨와 엄친아(줌마)들 역시 그 시선을 피해 갈 수 없다니.


근처에 여러 사람의 입맛에 맞을 수 있는 식당과 근사한 찻집이 있을 것

목은산회에는 걷기를 건너뛰고 ‘점심회’만 참석하기 위해 합류하는 멤버들도 있었다. 그이들을 위해서는 마음 편히 밥 먹고 차 마시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중요했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이 ‘식사’와 관련된 고려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비싸지 않으면서 쾌적하고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메뉴를 파는 식당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소문난 맛집이라고 해도 어떤 이들은 비위에 맞지 않다고,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적다고 다양한 이유들로 종종 까다롭게 굴기도 했다. 이를 고려한 밥집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계절을 고려할 것

더운 여름에는 적당히 시원하고 경치도 제법 근사한 실내외 공간을, 삭막하고 추워 걷기 힘든 겨울에는 꽃과 식물도 보고 푸근함을 느낄 수 있는 실내 공간을 선택했다.

한강물도 꽁꽁 어는 강추위에도 걷기는 계속되어야 했다. 그럴 때는 실내 산책을 제안했다. 식물원이나 박물관, 미술과 등. 가끔 비가 올 때면 걷기 대신 단체로 영화관람을 하기도 했다. 목요일은 산책하고 밥 먹는다,는 원칙은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변주되기도 했다. 유연함이 중요하다.

너무 더운 여름에도 걸었다. 숲이 깊어 시원한 곳이거나, 냉방 시설이 있는 실내이거나 그런 곳들을 정해 무더위에도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개화기를 고려할 것

매 목요일에 맞춰 활짝 피는 꽃들을 파악해 걸으며 눈호강도 할 수 있도록 산책 코스를 구성한다.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니까. 걷다가 멈추고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단체 메신저방에 공유된 사진을 보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남기기도 했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고 여유 있게 하는가.


참여자들의 건강 상태를 고려할 것

2013년 처음 목은산회가 시작되었을 때 1946년생 멤버의 나이는 만 67세, 47년생인 멤버의 나이는 만 66세였다.

본격적인 등반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난이도가 좀 있는 산책길 정도는 걸을 수 있는 멤버들이 많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경사가 있는 산길이나 만보 이상의 경로는 어려워하는 멤버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사소한 사고로 골절상을 입어 참여가 어려운 멤버들도 한 두 명씩 생기기도 했다.


참가비(식사비)는 1.5만 원을 넘지 않을 것

여고동창생들의 경제적 상황이 다 다르기도 하고, 매번 참가하는 것이 금전적인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식사비 포함 후식과 입장료 등은 모두 1.5만 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이런 요소들을 고려해 라니씨는 매주 산책코스를 정하고, 새롭고 낯선 장소일 경우 혼자라도 답사를 갔다.

작은 여행이지만 답사는 기본이니까.


그렇게 짜인 라니씨의 산책코스들이 궁금한가?

다음 이야기부터 본격적인 산책 코스가 등장한다.

6월에는 어딜 가면 좋을까? 7월에는?

photo by 라니씨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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